年 5조원대 거대 뮤지컬 산업…'해'가 지지 않는 英 웨스트엔드
‘오늘 저녁 티켓 있음. 20파운드(3만5000원)부터.’ 지난 19일 뮤지컬 ‘맘마미아’를 10년 가까이 공연 중인 런던의 유명 뮤지컬 전용극장 프린스오브웨일스 앞에 ‘표 있음’이라는 입간판이 서 있다. 때마침 평일 저녁. 기대 밖으로 싼값에 공연을 볼 수 있겠다 싶어 일행과 함께 티켓판매소를 들렀다. 하지만 20파운드짜리 좌석은 귀퉁이 자리뿐. 구할 수 있는 표는 주로 43파운드(7만6000원) 이상 비싼 자리였고, 그나마 몇 석 안 남았다. 고민하는 기자 일행에게 “좋은 자리는 몇 달 전에 예약해야 한다. 오늘은 운이 좋은 편”이라는 매표원의 설명이 뒤따랐다. 남아 있던 표마저도 중국과 싱가포르 관광객들이 몰려들면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싱가포르에서 왔다는 관광객 이추이신 씨는 “런던에 온 목적을 이뤘다”며 들뜬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뮤지컬 수도 웨스트엔드

年 5조원대 거대 뮤지컬 산업…'해'가 지지 않는 英 웨스트엔드
런던은 글로벌 뮤지컬 수도로 불린다. 이방인들이 이 사실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다. 런던시내 주요 지하철역들은 각종 뮤지컬 포스터들로 도배돼 있다시피 한다. 트래펄가광장의 내셔널갤러리 뒤편부터 피커딜리서커스역 근처까지 웨스트엔드 지역에는 각종 극장과 티켓판매소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인기작품은 전석 매진되기 일쑤고 몇 달 전 예매해놓은 좌석을 현장에서 티켓으로 교환하기 위해 늘어선 줄을 보는 것도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런던은 한때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에 ‘왕좌’를 내주기도 했지만 최근 몇 년간 ‘현대의 모차르트’라고 불리는 천재 작곡가 앤드루 로이드 웨버와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등 소위 4대 뮤지컬을 만든 제작자 캐머런 매킨토시를 앞세워 뮤지컬 업계의 주도권을 되찾았다.

‘캣츠’와 ‘오페라의 유령’ ‘미스 사이공’ 같은 유명 뮤지컬들은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초연해 검증받은 뒤 브로드웨이로 진출했다. 감각적이고 화려한 브로드웨이 뮤지컬에 비해 웨스트엔드 뮤지컬은 음악을 중시하고 문학적이고 철학적인 주제를 다룬 작품이 많다는 것이 특징이다.

1952년부터 60년간 공연 중인 애거서 크리스티 원작의 연극 ‘쥐덫’과 27년간 장기 공연 중인 ‘레미제라블’을 비롯해 ‘위키드’ ‘시카고’ ‘빌리 엘리어트’ ‘라이언 킹’ ‘싱잉 인 더 레인’ ‘오즈의 마법사’ ‘위 윌 록유’ 등 유명 작품들이 끝없이 뮤지컬 마니아들을 유혹하고 있다. 물론 야심찬 신작들이 첫선을 보이는 장소로 선택하는 곳도 런던이고, 뮤지컬 배우들의 꿈이 명멸을 거듭하는 곳도 바로 웨스트엔드다.

런던극장협회가 발간하는 ‘웨스트엔드리포트’ 최신판에 따르면 웨스트엔드 지역 50여개 전용극장에서 2009년 한 해 1만7899회의 공연이 열렸고, 연간 관람객 수는 1400만명을 넘었다.

◆5조원짜리 거대 산업

年 5조원대 거대 뮤지컬 산업…'해'가 지지 않는 英 웨스트엔드
웨스트엔드의 뮤지컬은 단순한 공연이 아니라 거대산업이다. 웨스트엔드가 한 해 창출하는 부가가치는 2009년 기준으로 최소 28억파운드(4조9400억원)로 추산된다. 티켓판매 수입만 5억47만파운드(8900억원)에 달한다. 2009년 이후 공식 집계는 없지만 지난해 부가가치 규모는 30억파운드(5조3000억원)를 넘겼을 것이란 게 업계 추정이다.

뮤지컬 산업의 효과는 전방위적이다. 공연 출연진부터 극장, 의상, 조명, 무대감독, 제작자, 극작가 등 4만1000여명의 직접고용 효과가 있다. 댄스학교, 디자인학교 등 각종 뮤지컬 인재양성과 관련된 교육기관이나 극장산업 관련 위원회까지 범위를 넓히면 고용규모는 더 늘어난다.

런던의 관광산업 역시 ‘뮤지컬로 먹고산다’는 표현이 지나치지 않을 정도다. 런던을 방문하는 300만명의 외지인 중 42%인 126만명이 뮤지컬을 보기 위해 런던을 찾는 것으로 조사됐다. 관람객의 70%가 웨스트엔드 인근의 식당을 이용하고, 22%가 근처 호텔에 투숙한다. 웨스트엔드에서 중국음식점이 몰려 있는 소호지역은 뮤지컬을 기다리거나, 뮤지컬을 보고난 후 먹고 즐기기 위한 인파로 거리가 가득 찬다. 관람객이 뮤지컬을 보기 위해 런던에 머무는 동안 1인당 평균 지출액은 118파운드(20만8000원)다.

경기를 타지 않는 것도 런던 뮤지컬 업계의 강점이다. 2002년 1200만명을 넘은 관람객은 2007년 1300만명, 2008년 1390만명으로 부쩍 늘었다. 글로벌 경제위기의 파고가 본격화됐음에도 불구하고 2009년에는 관람객이 1430만명으로 늘었다. 지난해엔 유럽대륙을 강타한 재정위기도 별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지난해 관람객이 1500만명을 돌파했을 것이란 기대도 나오고 있고, 웨스트엔드에서 그리스와 스페인에서 온 뮤지컬팬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영국 창조산업의 핵심

제조업이 취약하고, 경제위기로 금융산업이 타격을 입은 영국은 디자인이나 공연·미디어산업 같은 ‘창조산업(creative industry)’에서 활로를 모색하고 있다. 뮤지컬은 이런 영국의 창조산업에 끊임없이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원천 역할을 하고 있다.

뮤지컬은 영화 책 음반 등으로 영역을 넓히기에 적합하다. ‘원소스 멀티유징’의 대표 사례다. 런던에 있는 글로벌 2위 규모의 음원서비스 제공업체인 송킥닷컴의 덴 크로 최고경영자(CEO)는 “레이디 가가 같은 유명 대중가수들의 노래와 함께 웨스트엔드를 비롯한 런던 예술가들의 작품은 회사의 핵심 콘텐츠로 활용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벤처인큐베이팅 집적시설인 테크시티의 에릭 반 데르 클레이 CEO는 “런던의 금융중심지인 시티의 자금력과 웨스트엔드의 문화콘텐츠는 영국 창조산업을 지탱하는 양대축”이라고 강조했다.

런던=김동욱 기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