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과장 & 李대리] 4천원짜리 선물 돌리는 김부장이나 노총각한테 생갈치 보내는 거래처나…
무역업체 총무과에서 일하는 정 대리는 명절 때 부서장인 김 부장만 보면 화가 치민다. 정 대리가 다니는 회사에선 부서원들끼리 서로 명절 선물을 주고 받는 ‘미풍양속’이 있다. 그런데 김 부장이 직원들에게 주는 선물은 시가 5000원을 넘는 경우가 한 번도 없었다. 지난해 추석엔 화장품 샘플이 담긴 시가 4000원짜리 여행용 생활용품 세트가 김 부장이 직원들에게 돌린 선물이었다. 이번 설에 그가 준비하고 있는 것은 4500원짜리 핸드크림. 김 부장이 그러면서도 “직원들 선물 주느라 허리가 휘겠다”고 할 때면 구역질이 날 정도다. “부장이 아무리 싼 선물을 하더라도 밑에선 어쩔 수 없이 양주나 고기 세트 같이 제대로 된 선물을 할 수밖에 없죠. 정말 분하고 화가 나요.”

설이 1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김 과장 이 대리들은 이맘 때만 되면 명절을 맞는 설렘만큼이나 또 다른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직장 상사나 거래처, 가족, 친지들에게 줄 선물 고민이 머리 속 한켠에 자리잡고 있다. 선물 비용뿐 아니라 선물을 줬다가 괜히 역효과가 나지 않도록 선물을 고르는 데 고심을 거듭한다. 명절 선물에 얽힌 직장 내 에피소드를 정리한다.

◆HOMME나 HOME이나…마음이 최고

평소 직원들의 대소사를 잘 챙겨주는 자상한 상사인 Y 상무는 명절 때마다 부서 전 직원들에게 선물을 돌린다. 그는 지난해 추석에도 직원들의 명절 선물을 사기 위해 몰래 마트를 들렀다. 이번에는 화장품을 사기로 하고, 마음에 드는 걸 골라서 예쁘게 포장도 했다. 그러나 연휴 전날 선물을 뜯어본 여직원들이 실망한 눈치다. 남자 직원은 물론 여직원들에게도 똑같이 남성용 화장품이 전달된 것. 사연을 알아보니 Y 상무가 화장품에 적혀 있는 HOMME(옴므, 프랑스어로 ‘남성’)를 HOME(집)으로 착각해 집에서 남녀공용으로 사용하는 화장품인줄 알고 샀던 것이다. 물론 이 사실이 밝혀지곤 사무실은 한바탕 웃음 바다가 됐다. “상무님의 ‘귀여운’ 착각 때문에 여직원들의 ‘남친’들이 덕을 보게 됐죠. 하지만 부하 직원들을 챙겨주려는 상무님의 따뜻한 마음만은 어디 가겠어요.”

◆명절 보너스 2題

잘나가는 금융 회사에 근무하는 박 대리. 설 보너스도 두둑해서 늘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 설 보너스가 나올 때쯤이면 어김없이 연락오는 사람이 있다. 시어머니다. 지난 토요일 이른 시간, 시어머니로부터 “지나는 길에 잠깐 들를 참”이라면서 전화가 왔다. 평소 선물과 쇼핑을 좋아하는 시어머니. 박 대리의 예상은 한치도 어긋나지 않았다. 하루만 같이 놀자고 하면서 자연히 백화점으로 향했다. 그랜드 바겐 세일이 한창인 백화점, 시어머니는 비싼 브랜드만 골라 다닌다. 박 대리는 울며 겨자먹기로 매번 그렇게 명절선물을 한다. 올해는 모피를 사드렸다. “솔직히 보너스 나올 때쯤이면 어김없이 연락 오는 시어머니가 얄밉기도 합니다. 그런데 한편으론 마음에 드는 걸 딱 찍어 얘기하고, 그걸 사 드리면 좋아하시는 걸 보면 이게 더 편하다는 생각도 드네요.”

중견 건설사에 다니는 이 대리는 지금도 작년 추석 때를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외근 나갔다가 들어온 그는 사무실 분위기가 평소와 달리 무척 냉랭한 데 의아했다. 마침 직원들 책상마다 라면 한 상자씩 놓여 있었다. 회사 상황이 너무 나빠 보너스를 줄 형편이 못 돼 대신 라면 한 상자씩으로 갈음한다는 것이었다. “모두들 아무 말 없이 허공만 바라보고 있는데 ‘쫄따구’인 저는 어떻게 해야 될지도 모르겠더라고요. 고참 한 분이 라면 상자를 바닥에 팽개치고 밖으로 나가자, 모두들 따라나가 술만 퍼 마셨죠.”

◆갈치 손질하는 노총각 신세

제주도가 고향인 노총각 김 과장. 구매팀에 근무하는 그는 명절 때 적잖이 선물을 받는다. 그렇지만 선물이라고 무조건 반갑지 만은 않다. 그를 짜증나게 하는 대표적인 선물 품목은 생갈치다. 친척들도 모두 고향에 있어, 서울에서 사고무친으로 지내는 그는 선물을 달리 전해줄 때도 마땅찮다. 아이스박스째 냉동실에 넣어두고 싶지만, 크기가 맞지 않는다. 칼을 들고 갈치 머리를 자르고, 내장 빼내고 토막 내 랩에 싸는 자신을 보면서 ‘이 짓 하기 싫어서라도 빨리 장가 가야지…’하는 생각뿐이다. 그렇게 어렵게 손질했지만, 결과는 더 허무하다. 설 때 받은 갈치는 결국 추석 때쯤이면 다 버리고 만다. 이번 설, 김 과장은 차라리 값은 싸더라도 참치캔이나 햄 세트가 더 반갑다.

◆이제 홍삼 싫습니다

좋아하는 선물이라도 너무 많이 받으면 당연히 지겹다. 대기업 광고팀에 근무하는 천 대리는 ‘홍삼 마니아’로 불린다. 하루 한 포씩 빠뜨리지 않고 홍삼액을 마시고, 주위 동료나 거래처에도 적극 권한다.

문제는 지난해 설 때 일어났다. 여기저기서 선물이 들어왔는데 선물의 90% 이상이 ‘홍삼 엑기스’였다. 그가 평소 이곳저곳에 홍삼 예찬을 늘어놓은 터라 그를 아는 사람들 모두가 홍삼을 선물했다. 천 대리는 처음엔 기분좋게 받았으나, 서서히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게다가 유통기한을 생각하면 하루에 몇 포씩은 먹어 치워야 할 판이다. 그 해 추석, 아직도 한참 남았는데, 홍삼이 또 무더기로 들어왔다. 이제 천 대리는 주위에 이렇게 말하고 다닌다. “저 이제 홍삼 싫습니다.”

◆선물 돌려막기의 역습

명절 선물을 했다가 오히려 낭패를 보는 경우도 있다. 선물 ‘돌려막기’가 대표적이다. 중견기업에 근무하는 김 과장은 2년 전 설 명절 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아찔하다. 거래처에서 받은 비싼 전복을 직속 부장에게 마치 자신의 선물인 양 선물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전복을 포장한 스티로폼 아래 쪽에 거래처 직원의 명함이 깔려 있었던 것. 설 연휴가 끝난 후 김 과장은 부장에게서 “OOO 부장이 누군가, 마음만은 자네 것이겠지”라는 싸늘한 반응이 돌아왔다. “그 일 이후 선물을 받으면 가장 먼저 명함부터 찾게 돼요. 또 받은 선물을 다른 사람에게 선물로 재활용하지 않게 되네요.”

출판사에 다니는 황 부장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그는 설을 맞아 작가들과 거래업체 등으로부터 설 선물을 받았다. 마침 설 연휴 때 처갓집에 들르지 못할 상황이 돼 대신 근사한 선물로 만회하기로 했다. 들어온 선물 중 가장 비싼 한우 세트 하나를 골라 처갓집으로 보냈다. 자신이 직접 구매한 선물인 것처럼 보이기 위해 새롭게 다시 포장했다. 장모님께는 “못 찾아뵙는 대신 약소한 선물을 마련했다”고 전화까지 드렸다. 하지만 며칠 후 장모의 전화를 받고는 얼굴이 새빨개져야 했다. “자네, 선물 상자 안에 명함이 있길래 혹시나 해서 알려줌세. OO인쇄 OOO사장이라고 돼 있구먼.”

강경민/윤성민/고경봉/노경목/윤정현 기자 kkm1026@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