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보다 밥"…美의 재무장 요구 거절하고 日 경제부흥 '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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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의 아젠다, 성공한 리더십
신년기획 선택 2012 (5·끝) 요시다 시게루 前 일본 총리
"미-소 냉전체제 휘말리면 전후 재건 물거품 된다"
'안보 무임승차'로 경제 집중
정치인 대신 실무형 인재 기용…'傾斜생산'으로 중공업 키워 경제대국 도약 토대 만들어
신년기획 선택 2012 (5·끝) 요시다 시게루 前 일본 총리
"미-소 냉전체제 휘말리면 전후 재건 물거품 된다"
'안보 무임승차'로 경제 집중
정치인 대신 실무형 인재 기용…'傾斜생산'으로 중공업 키워 경제대국 도약 토대 만들어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월. 존 덜레스 미국 대통령 특사가 비밀리에 일본을 방문, 총리 관저를 찾았다. 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요시다 시게루 (吉田茂)총리와 마주앉았다. 덜레스 특사가 꺼낸 첫마디는 뜻밖에도 일본의 재(再)무장 요구였다.
미국이 종전 후 대일 정책의 기조로 삼았던 ‘일본 비(非)군사화’ 정책이 후퇴하는 순간이었다. 당시 소련과 첨예한 대립각을 세웠던 미국은 동아시아 반공기지 건설을 위해 일본의 군사력이 필요했다. 재무장을 하면 6년간 계속된 미 군정의 통치를 끝내겠다는 조건도 제시했다.
요시다 총리는 잠시 생각에 잠긴 뒤 ‘수용할 수 없다’고 답했다. 일본의 재무장은 동아시아 지역의 군사적 긴장감을 높이는 부작용을 낳는다는 이유에서였다. 일본 신헌법이 규정한 군사력 포기 원칙도 지켜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속내는 달랐다. 당시 일본 경제는 한국전쟁 특수를 누리며 막 꿈틀대고 있었다. 재무장은 이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다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재무장은 자칫 일본 경제를 다시 냉전의 분쟁 속에 던져넣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미국 핵우산 속에 경제자립 ‘올인’
1946년 총리에 오른 요시다의 아젠다는 ‘경제우선’이었다. 당시 일본은 폐허만 남은 ‘절망의 땅’이었다. 도쿄에는 성한 건물이 거의 없어 대부분 시민이 방공호 속에서 겨울을 났다. 성인 한 명의 식량 배급량은 하루 315g에 불과했다. 이마저도 배급이 몇 주일씩 끊길 때가 많았다. 요시다는 무엇보다 일본인들의 배고픔을 해결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는 더글러스 맥아더 미 점령군 사령관을 찾아갔다. “민주주의를 실천하려면 우선 국민을 먹여 살리고 일자리를 줘 생활을 안정시켜야 한다”고 설득했다. 맥아더가 탐탁하지 않은 표정을 짓자 요시다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정권이 좌파에 넘어갈 수도 있다”고 매달렸다. 결국 맥아더는 요구를 받아들였다. 매년 70만t의 식량원조를 결정했다. 식량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요시다 내각은 국민의 지지를 얻었다.
요시다의 다음 과제는 경제 회복에 걸림돌이 되는 세력을 무력화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헌법 제정을 수단으로 삼았다. 헌법에 일본이 가야 할 좌표를 명기함으로써 군사력 포기와 경제중심의 정책을 누구도 거부할 수 없게 만들겠다는 구상이었다. 1948년 그는 전쟁을 포기하고 군대를 갖지 않는 내용을 포함한 헌법 개정을 추진했다. 좌·우파 양쪽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군사력을 포기한 주권국가는 없다는 논리였다.
요시다는 국민들을 직접 설득했다. 라디오 연설을 통해 “군사력 없는 자립만이 전후 일본이 가야 할 길”이라고 호소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 일본의 평화헌법이었다.
요시다는 이후 헌법정신에 위배되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정부 요직에서 배제했다. 군부세력을 배후로 하는 극우세력과 급진 좌파가 그 대상이었다.
◆철저한 ‘능력 중시’ 인사
요시다는 내각에 정치인을 되도록 기용하지 않았다. 경제문제를 해결하는 데 정치인들은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자신을 총리로 추천한 정계의 실력자들에게도 인사권에 개입하지 말아달라고 요구할 정도였다. 그가 중용한 사람들은 실무형 관료들이었다. 경제재건에 ‘능력있는 실무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의 실용주의적 면모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경제재건을 위한 아이디어가 있는 사람들은 모두 자기 사람으로 만들었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였던 아리사와 히로미 도쿄대 교수를 경제자문역으로 기용하고, 그가 제안한 ‘경사생산(傾斜生産)’ 방식을 채택해 일본 산업발전의 기초를 세웠다.
미국의 원조로 확보한 중유를 철강 부문에 집중 투입해 생산을 늘리고, 이 철강을 다시 석탄 생산량 확대에 사용하는 과정을 반복함으로써 철강과 석탄량을 크게 늘리는 전략이었다. 모든 산업의 기초가 되는 철강과 석탄을 충분히 확보함으로써 경제성장의 엔진으로 삼겠다는 뜻이었다.
생필품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일본에서 생산재 집중 생산은 적잖은 논란을 불러왔다. 하지만 요시다는 생산재가 충분히 확보되면 이로 인한 파급 효과가 생필품 생산 부문으로 이어질 것으로 봤다. 예상은 적중했다.
1952년 일본은 미 군정의 통치에서 벗어났다. 요시다에게는 일본 경제를 과거처럼 일으켜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는 군국주의자로 낙인이 찍혀 추방된 관료 및 경제인을 복권조치했다. 미쓰이 미쓰비시 스미토모 등 6대 기업 그룹이 점차 부활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후 일본 경제성장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경제 위해 군사력 포기
외교에서도 경제부흥에 모든 것을 걸었다. 핵심 국가는 미국이었다. 미국에 국가안보를 맡기고 일본은 경제에만 집중하겠다는 전략이었다. 1951년 미국과 단독 강화조약을 추진했다.
그러나 미국과의 단독강화는 극심한 반대에 부딪쳤다. 미국과 소련이 냉전에 돌입한 상황에서 미국과 단독 강화를 맺어서는 안 된다는 국민 여론이 높았다. 진보 진영에서는 소련 중국 등 사회주의권 국가를 포함한 전 연합국과의 전면 강화론을 내세웠다.
그는 “친미와 경제우선만이 일본이 살길”이라며 국민들과 의회를 설득했다. 그해 9월 미국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이를 기반으로 일본은 경제부흥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지평 LG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이정호 기자 dolph@hankyung.com
미국이 종전 후 대일 정책의 기조로 삼았던 ‘일본 비(非)군사화’ 정책이 후퇴하는 순간이었다. 당시 소련과 첨예한 대립각을 세웠던 미국은 동아시아 반공기지 건설을 위해 일본의 군사력이 필요했다. 재무장을 하면 6년간 계속된 미 군정의 통치를 끝내겠다는 조건도 제시했다.
요시다 총리는 잠시 생각에 잠긴 뒤 ‘수용할 수 없다’고 답했다. 일본의 재무장은 동아시아 지역의 군사적 긴장감을 높이는 부작용을 낳는다는 이유에서였다. 일본 신헌법이 규정한 군사력 포기 원칙도 지켜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속내는 달랐다. 당시 일본 경제는 한국전쟁 특수를 누리며 막 꿈틀대고 있었다. 재무장은 이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다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재무장은 자칫 일본 경제를 다시 냉전의 분쟁 속에 던져넣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미국 핵우산 속에 경제자립 ‘올인’
1946년 총리에 오른 요시다의 아젠다는 ‘경제우선’이었다. 당시 일본은 폐허만 남은 ‘절망의 땅’이었다. 도쿄에는 성한 건물이 거의 없어 대부분 시민이 방공호 속에서 겨울을 났다. 성인 한 명의 식량 배급량은 하루 315g에 불과했다. 이마저도 배급이 몇 주일씩 끊길 때가 많았다. 요시다는 무엇보다 일본인들의 배고픔을 해결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는 더글러스 맥아더 미 점령군 사령관을 찾아갔다. “민주주의를 실천하려면 우선 국민을 먹여 살리고 일자리를 줘 생활을 안정시켜야 한다”고 설득했다. 맥아더가 탐탁하지 않은 표정을 짓자 요시다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정권이 좌파에 넘어갈 수도 있다”고 매달렸다. 결국 맥아더는 요구를 받아들였다. 매년 70만t의 식량원조를 결정했다. 식량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요시다 내각은 국민의 지지를 얻었다.
요시다의 다음 과제는 경제 회복에 걸림돌이 되는 세력을 무력화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헌법 제정을 수단으로 삼았다. 헌법에 일본이 가야 할 좌표를 명기함으로써 군사력 포기와 경제중심의 정책을 누구도 거부할 수 없게 만들겠다는 구상이었다. 1948년 그는 전쟁을 포기하고 군대를 갖지 않는 내용을 포함한 헌법 개정을 추진했다. 좌·우파 양쪽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군사력을 포기한 주권국가는 없다는 논리였다.
요시다는 국민들을 직접 설득했다. 라디오 연설을 통해 “군사력 없는 자립만이 전후 일본이 가야 할 길”이라고 호소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 일본의 평화헌법이었다.
요시다는 이후 헌법정신에 위배되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정부 요직에서 배제했다. 군부세력을 배후로 하는 극우세력과 급진 좌파가 그 대상이었다.
◆철저한 ‘능력 중시’ 인사
요시다는 내각에 정치인을 되도록 기용하지 않았다. 경제문제를 해결하는 데 정치인들은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자신을 총리로 추천한 정계의 실력자들에게도 인사권에 개입하지 말아달라고 요구할 정도였다. 그가 중용한 사람들은 실무형 관료들이었다. 경제재건에 ‘능력있는 실무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의 실용주의적 면모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경제재건을 위한 아이디어가 있는 사람들은 모두 자기 사람으로 만들었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였던 아리사와 히로미 도쿄대 교수를 경제자문역으로 기용하고, 그가 제안한 ‘경사생산(傾斜生産)’ 방식을 채택해 일본 산업발전의 기초를 세웠다.
미국의 원조로 확보한 중유를 철강 부문에 집중 투입해 생산을 늘리고, 이 철강을 다시 석탄 생산량 확대에 사용하는 과정을 반복함으로써 철강과 석탄량을 크게 늘리는 전략이었다. 모든 산업의 기초가 되는 철강과 석탄을 충분히 확보함으로써 경제성장의 엔진으로 삼겠다는 뜻이었다.
생필품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일본에서 생산재 집중 생산은 적잖은 논란을 불러왔다. 하지만 요시다는 생산재가 충분히 확보되면 이로 인한 파급 효과가 생필품 생산 부문으로 이어질 것으로 봤다. 예상은 적중했다.
1952년 일본은 미 군정의 통치에서 벗어났다. 요시다에게는 일본 경제를 과거처럼 일으켜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는 군국주의자로 낙인이 찍혀 추방된 관료 및 경제인을 복권조치했다. 미쓰이 미쓰비시 스미토모 등 6대 기업 그룹이 점차 부활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후 일본 경제성장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경제 위해 군사력 포기
외교에서도 경제부흥에 모든 것을 걸었다. 핵심 국가는 미국이었다. 미국에 국가안보를 맡기고 일본은 경제에만 집중하겠다는 전략이었다. 1951년 미국과 단독 강화조약을 추진했다.
그러나 미국과의 단독강화는 극심한 반대에 부딪쳤다. 미국과 소련이 냉전에 돌입한 상황에서 미국과 단독 강화를 맺어서는 안 된다는 국민 여론이 높았다. 진보 진영에서는 소련 중국 등 사회주의권 국가를 포함한 전 연합국과의 전면 강화론을 내세웠다.
그는 “친미와 경제우선만이 일본이 살길”이라며 국민들과 의회를 설득했다. 그해 9월 미국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이를 기반으로 일본은 경제부흥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지평 LG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이정호 기자 dolp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