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뿌리깊은 나무
‘뿌리깊은 나무’. 이는 지난 주까지 모 방송국에서 방영한 24부작 드라마 제목이다. 2006년 출간된 이정명 소설을 극화한 것으로 짜임새 있는 스토리와 반전이 거듭되는 극의 전개, 또한 출연진들의 개성 넘치는 연기로 횟수를 더할수록 빠져들게 됐다.

이 드라마는 역사책에 나오지 않은 한글 창제의 배경과 과정 그리고 그것을 반대한 세력과의 갈등, 세상을 바꾸고자 한 세종의 고뇌와 열정, 대업을 이루기 위해서 치뤄야만 하는 희생을 아프게 그렸다. 특히 극중 세종(한석규)의 독백은 리더의 외로움과 고통을 잘 표현해줬다. “이 나라 조선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두 내 책임이다. 꽃이 지고 홍수가 나고 벼락이 떨어져도 내 책임이다… 모든 책임을 지고 그 어떤 변명도 필요 없는 자리….”

역사의 현장에는 늘 존재했던 왕권(王權)과 신권(臣權)의 정치적 대립도 있었고, 새로운 변화에 대항하는 기득권의 속성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우매한 백성에 대한 크고 깊은 세종의 사랑과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세종의 인간적 모습도 가슴을 아리게 했다.

필자는 역사드라마를 좋아한다. 단순한 역사가 아니고 그 속에서 현실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극중 인물들에게 스스로를 투영해 보기도 하고, 오늘의 정치판을 대입해 보기도 하고,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뭔가를 고민하기도 한다.

여기서는 세종을 재조명해 현재의 리더의 모습을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닐까? 리더는 어떤 어려움에서도 대의(한글 창제)를 위해 초심이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대의를 위해 자식(광평대군)을 잃은 인간적인 아픔도 삼켜야 하며, 일을 수행함에 있어서는 손자병법의 암도진창(暗渡陳倉·정면공격할 것처럼 위장해 허술한 후방을 공격하는 계책)의 경영 전략도 구사할 수 있는 능력자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눈길을 끌었던 건 든든한 도반들의 세종에 대한 신뢰다. 집현전 학사들은 말할 것도 없고, 세종에게 원한으로 뭉쳐 있던 강채윤(장혁)도 세종의 사람이 되어 한글 반포를 돕게 만들고, 죽어가면서까지 한글의 해례(근본)를 완성하는 소이(신세경), 아버지가 하고자 하는 일에 자신의 목숨도 기쁘게 버릴 수 있다고 말하는 광평대군의 모습을 통해 신뢰를 얻고 있는 리더의 모습이 이런 게 아닐까 생각했다.

이 드라마는 과거 태종의 칼의 정치가 아닌 소통의 정치, 그 중요성을 한글이라는 소재를 통해 강하게 표현했다. 이는 단순히 정치만의 문제는 아닌듯 하다. 요즘 직장에서도 그렇고 학교에서도 그렇고 가정에서도 그렇다.

엊그제 한 해를 마무리하는 휴가로 제주도에 다녀왔다. 제주공항 라운지에서 놀라운 광경을 봤다. 한 오래된 부부의 대화를 듣게 되었는데 동문서답의 대화를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반복하고 있는 그들의 모습에서 우리의 현실을 느끼게 됐다. 2012년 새해 목표는 진심이 담긴 열린 소통을 통해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신뢰하는 인간 세종의 모습을 닮아보는 것으로 하면 어떨까. 뿌리깊은 나무가 되기 위해….

이행희 < 다국적기업최고경영자협회장 leehh@corni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