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이 그룹 지주회사 역할을 하는 삼성에버랜드의 2대 주주로 KCC그룹을 선택했다. 두 그룹이 그동안 한번도 협력관계를 맺은 적이 없다는 점, KCC가 삼성과 오랜 경쟁관계에 있는 범(汎)현대 기업이란 점에서 양측이 손잡게 된 배경에 관심이 쏠린다.

시장에선 삼성은 에버랜드의 우호적 지분투자자를 확보하는 차원에서, KCC는 삼성과의 포괄적 협력관계를 맺기 위해 이런 결정을 내린 것으로 보고 있다.

◆삼성, 왜 KCC를 선택했나

삼성에서 에버랜드는 단순 계열사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에버랜드→생명→전자→카드→에버랜드’로 이어지는 순환출자 구조의 정점에 있는 사실상 지주사이기 때문이다.

‘금융산업 구조개선에 관한 법률’(금산법) 규정에 따라 삼성카드는 내년 4월까지 에버랜드 지분(25.64%)을 5% 미만으로 낮춰야 한다. 물론 에버랜드가 비상장사이고 이건희 회장을 비롯한 대주주 일가 지분이 45.6%에 달해 지분 매각 이후에도 에버랜드 경영권에는 큰 변화가 없다.

그러나 삼성카드의 에버랜드 지분을 누가 인수하느냐에 따라 나중에 경영권 분쟁이 생길 가능성을 완전 배제할 수는 없다. 여기에다 에버랜드 주식가치는 1주당 200만원가량에 달해 20%를 인수하려면 1조원가량 든다. 국내외에서 이만한 자금동원 능력을 갖춘 우호적 투자자를 찾기가 쉽지 않다. 때문에 삼성 내에서도 카드의 에버랜드 지분을 누구에게 팔지를 두고 고심을 거듭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점에서 KCC는 최적의 후보다. 지분매각을 주도한 인수·합병(M&A) 관계자는 “소버린펀드 등 해외 사모펀드를 상대로 태핑(수요조사)을 했지만 KCC에서 제시한 조건이 가장 좋았다”며 “KCC가 현대자동차, 만도, 현대중공업 등의 2대 주주로 참여해 단순 투자자 역할만 해왔다는 점도 삼성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한 요인”이라고 말했다.

◆KCC, 삼성과의 포괄적 협력 추진

KCC로서도 에버랜드 지분 인수가 ‘밑지는 장사’는 아니다. 앞서 KCC는 지난 7월 만도 지분을 처분해 6370억원, 이달 초 현대차 지분을 매각해 2397억원 등 모두 8767억원의 현금을 확보했다. 당초 KCC는 이 자금을 M&A 등에 투입할 계획이었으나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각에선 KCC가 상장사인 현대차와 만도 주식을 팔고 비상장사인 에버랜드 지분을 샀다는 점에서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해석을 내놓기도 한다.

KCC 측은 그러나 “이면 계약은 없다”고 강조했다. 이어 “에버랜드는 안정적 사업 기반을 확보한데다 작년에 매출 2조원을 돌파하는 등 실적도 좋다”며 “나중에 상장할 경우 얻을 차익도 상당할 것이란 점에서 투자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KCC는 삼성에버랜드가 추진 중인 태양광발전 분야 협력도 염두에 둔 것으로 알려졌다. KCC는 태양전지 원료인 폴리실리콘 사업을 신사업으로 추진 중이다.

현실적으로 보다 큰 이익도 있다. KCC의 기존 사업인 도료와 건설자재 분야의 신규 거래처를 확보할 수 있다는 점이다. KCC는 국내 도료(페인트)와 건축자재 분야 1위 기업이지만 삼성중공업, 삼성물산 건설부문 등 삼성 납품 실적은 사실상 ‘제로(0)’였다.

KCC 고위 관계자는 “내년 글로벌 경기침체로 도료, 건축자재 시장이 갈수록 어려워질 것으로 보여 우리로서도 새 수요처를 확보해야 한다”며 “에버랜드 2대 주주가 되면 기존 사업과 관련한 삼성그룹의 조선, 건설 시장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고 설명했다.

◆향후 삼성 지배구조는

KCC가 에버랜드 지분 17%를 매입했지만 에버랜드 경영권에는 변화가 없다. 하지만 삼성그룹 지배구조는 바뀐다.앞으로 삼성카드가 에버랜드 잔여지분 8.6% 중 3.6% 이상을 팔면 ‘에버랜드→생명→전자→카드→에버랜드’의 순환출자 구조가 끊어지는 까닭이다. 15년 만의 지배구조 변화다. 삼성 관계자는 “그룹 지배구조의 외형만 기존 순환출자 구조에서 수직형 구조로 바뀌는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시장에선 그러나 에버랜드 지분매각을 계기로 지배구조에 대한 삼성의 고민이 본격화될 것으로 보고 있다. 3세 경영권 승계를 앞두고 어떤 식으로든 지배구조를 손질해야 한다는 점에서다. 이재용 사장이 전자와 금융부문, 이부진 사장이 호텔·레저와 상사·화학부문, 이서현 부사장이 패션·광고·전자소재 부문을 나눠 맡는 구조를 갖추려면 에버랜드 지분부터 정리해야 한다.

가장 유력한 시나리오는 에버랜드를 지주사로 전환하는 것이다. 에버랜드를 사업회사와 지주회사로 분리한 다음 지주회사 밑에 삼성전자, 삼성물산 등을 자회사로 두는 방안이다. 삼성생명을 금융계열사를 총괄하는 중간금융지주사로 만드는 방안도 있을 수 있다. 그룹 관계자는 “지배구조 개선과 계열분리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한 작업”이라고 말했다.

이태명/장창민 기자 chihir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