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문현답’은 허준영 코레일(한국철도공사) 사장(59)의 경영철학이다. 어리석은 질문(愚問)에 현명한 대답(賢答)이라는 뜻은 물론 아니다. ‘우리의 문제는 현장에 답이 있다’는 의미다. 현장과 소통을 중시하는 허 사장의 신념을 잘 보여주는 말이다.

코레일 노사는 지난 15일 봉래동 서울 사옥 8층 영상회의실에서 2년 연속 ‘평화적으로’ 임금협약을 맺었다. 2005년 공사 출범 이후 임금협상 때마다 파업이 벌어지는 등 진통을 겪어왔다. 그러나 허 사장이 2009년 부임한 이후 지난해 최초로 무결렬·무쟁의 임금협약을 체결한 데 이어 올해도 쟁의 없이 협약을 맺었다. 특유의 친화력을 바탕으로 한 허 사장의 ‘우문현답 경영’이 맺은 성과다. 허 사장은 “그동안 국민들은 ‘철도’하면 해마다 되풀이되는 명분 없는 파업과 적자기업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만 떠올렸다”며 “소통과 상생경영으로 짧은 기간 안에 이런 인식을 바꿔 놓은 게 가장 큰 보람”이라고 말했다. 지난 25일 서울 사옥에서 허 사장을 만났다.

▶ 경찰청장 출신이어서 강성 노조와의 충돌이 우려되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이 저에 대해 강하고 엄격할 것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는 것 같아요. 그 부분은 저도 늘 안타깝게 생각해 왔죠. 경찰의 이미지가 강하다 보니 그렇게 비쳤나 봅니다. 부임 직후 법과 원칙에 입각한 노무관리를 천명하고 일관된 기조를 유지했기 때문에 노조와 마찰이나 갈등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에요. 하지만 갈등 속에서도 대화와 설득을 멈추지 않았고 원칙을 준수하는 고용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지금은 노조원들의 의식이 눈에 띄게 개선됐죠.”

▶ 부임 첫해인 2009년 파업에 참여한 노조원 1만여명을 징계했는데.

“당시 경제가 어려운 상황이었는데도 노조는 인사권과 경영권에 과도한 요구를 했어요. 국민을 볼모로 잡는 파업은 더 이상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죠. 해마다 파업, 징계, 해고자 발생, 복직 등을 되풀이하는 문제도 바로잡아야 했어요. 연례행사처럼 여겨지던 파업관행을 바꾸려면 전과는 달라야 했죠. 명분 없는 파업에는 반드시 징계가 따른다는 것을 보여줘야 했습니다. 직원들은 설마했지만 과감하게 대규모 징계를 단행했습니다. 영문도 모르고 노조 집행부에 끌려다니는 직원들에게는 다시 한번 생각할 기회를 줬어요. 징계는 사실 경영자 입장에서는 가슴 아픈 일입니다.”

▶ 후유증도 만만치 않았을 텐데.

“징계를 많이 하다 보니 조직이 침체되고 직원들의 사기가 떨어졌죠. 현장을 더 자주 방문했고 지방 직원 가족까지 본사로 초청해 화합을 도모했습니다. 평가를 통해 직원들에게 300%가 넘는 성과급도 지급했죠. 지금은 체육대회 때 노조간부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기도 하고 등산도 함께 갑니다. 직원 복지문제는 노조와 경영진이 경쟁관계로 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노조가 직원복지 문제를 제기하기 전에 경영진이 먼저 알아서 해줘야 한다는 것이죠.”

▶ 지난 2월 광명역 KTX 탈선사고 이후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광명역 사고 이후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전 임직원이 혼연일체가 돼 눈물겨운 노력을 시작했습니다. 이런 노력 덕분에 열흘에 2건 이상이던 KTX 차량 고장 건수가 눈에 띄게 줄었어요. 현재는 가장 안정적이던 2007년 이후의 0.06건(100만㎞당 고장 건수) 이하로 안정을 되찾았습니다. 사고가 일어나는 핵심 요인은 ‘기술력 부족’으로 요약할 수 있죠. 자체 기술력 강화 노력과 함께 차량제작업체, 철도 건설 주체인 한국철도시설공단 등과 철도산업 전반의 기술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 전화위복됐다는 말인지요.

“광명역 사고는 국내 철도 창설 112주년을 맞아 위기를 기회로 대반전시키며 안전문제를 확고하게 다지는 계기가 됐죠. 안전과 함께 사고 예방도 강조하게 됐습니다. 실례로 지난 여름 태풍이 지나간 어느 날 기관사가 운행 중 수백 전방에 터널 입구가 보여야 하는데 보이지 않자 급제동을 한 일이 있었습니다. 산사태로 나무가 쓰러져 터널 입구를 막은 것이지요. 기관사가 지형을 잘 몰랐다면 대형 사고가 발생할 수도 있었던 긴박한 상황이었습니다. 철도는 운영·시설·차량이 어우러진 종합적인 시스템 산업입니다. 건설과 제작과정에서부터 고객이 이용하기 편리한 철도, 안전한 철도가 만들어져야 해요.”

▶ 용산국제업무지구 개발 공사가 시작됐지요.

“중단 위기를 맞았던 용산개발사업이 코레일의 토지대금 납부이연 등 정상화 방안에 따라 다시 추진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서부이촌동 주민보상 문제와 인·허가 등 해결해야 할 과제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이런 현안들은 사업 시행사인 드림허브 프로젝트금융투자가 주민 및 관계기관과 긴밀한 협력을 통해 잘 추진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 용산지구의 청사진을 소개해 주시지요.

“100층 높이의 랜드마크빌딩을 비롯해 백화점, 호텔, 상업 및 주거문화시설 등 약 60개 동의 건물이 들어서는 대규모 프로젝트입니다. 이 지역은 KTX와 15개 전철노선이 집결되는 교통 요충지이자 용산공원과 한강 수변공원을 갖춘 국내 최고의 명품 주거단지로 조성될 예정입니다. 36만명의 고용효과, 51조원의 생산유발 효과, 연 500만명의 외국인 관광객 유치로 국익 창출에도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합니다.”

▶ 철도공사와 철도시설공단의 통합 문제가 다시 불거지고 있습니다.

“사실 사장에 부임하기 전에는 공사와 공단이 분리돼 있는지조차 몰랐습니다. 일반 국민들도 잘 모를 겁니다. 가장 큰 문제는 안전입니다. 한 역사 안에 엘리베이터는 철도공단, 에스컬레이터는 코레일이 관리하는 곳도 있습니다. 철도는 시스템 산업이어서 선로, 차량, 신호, 통신 등 다양한 요소들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기능을 수행할 때 가장 효과적으로 운영되죠. 최근 KTX 산천 고장 등 안전문제가 발생하는 것도 철도차량 제작과 레일시공, 열차운영 등이 분리돼 유기적인 관리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 해외에서는 어떤가요.

“시설과 운영의 분리 모델이었던 프랑스도 지금 홍역을 치르고 있습니다. 선로 사용료 문제로 갈등을 빚고 있고, 다시 통합해야 한다는 여론이 확산되는 분위기입니다. 일본도 한 회사가 시공, 운영, 설계, 차량제작까지 다 하고 조립만 따로 맡기고 있죠. 운영기관인 코레일이 건설, 제작 부문을 아우르고 리드해 철도경쟁력을 높여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

▶ ‘글로리 운동’을 시작했는데.

“글로리(GLORY·Green Life Of Railway Yearning) 운동은 ‘철도를 열망하는 녹색생활’이라는 뜻을 담고 있죠. 철도판 새마을운동입니다. 고객들이 철도로 올 때까지 기다리던 소극적 자세에서 벗어나 국민과 함께 기차 타기 캠페인을 펼치고, 철도변에 꽃길을 조성하는 등 국민에게 적극 다가가기 위해 벌인 운동입니다. ”

▶ 최근 자서전을 출간했는데.

“기차는 법과 원칙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레일에서 1만 벗어나도 탈선하기 때문에 정해진 레일로만 다닙니다. 열차가 주는 가르침처럼 바르고 부드럽게 원칙을 지키며 생활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세상에 전하고 싶었죠. 책 제목을 ‘바르고 부드럽게’라고 정한 이유입니다. 제 소신을 믿고 따라준 모든 지인에게 드리는 경험과 철학의 고백이며, 앞으로도 이렇게 살아가겠다는 다짐이기도 합니다.”


◆ 허준영 사장은…외교관 출신, 경찰청장 지내

외무고시에 합격해 외교관 생활을 하다 경찰로 전직, 경찰 총수를 지낸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다. 외교관 시절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 선진국 경찰들이 국민으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는 것을 보고 경찰에서 제2의 인생을 시작, 제12대 경찰청장까지 올랐다.

2009년 3월 코레일 사장으로 부임한 이래 ‘허철도’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완벽한 철도맨으로 변신했다. 국제철도연맹(UIC) 아시아지역 의장을 맡고 있다.


◆ 주요 약력

△1952년 대구 출생 △경북고·고려대 행정학과 △서울대 행정대학원 △명지대 대학원 산업공학 박사 △제14회 외무고시 합격(1980) △외무부 기획관리실, 아주국, 영국, 프랑스 근무(1980~1984) △경찰 임용(1984) △주 홍콩 총영사관 영사(1984~1989) △경북도·강원도지방경찰청 차장, 경찰청 경비교통국 교통심의관(1999~2001) △중앙경찰학교장, 강원경찰청장(2001~2003) △대통령비서실 치안비서관(2003~2004) △서울경찰청장(2004~2005) △제12대 경찰청장(2005~2009)

임호범 기자 lh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