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조직이 한데 뭉쳐 싸우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현장의 투쟁동력은 가라앉고 지도부의 리더십도 작동하지 않고…." 민주노총의 한 간부는 조직의 위기상황을 이같이 표현했다. 그는 "현장 조직이 꿈쩍도 하지 않을 정도로 노동운동이 가라앉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현대 · 기아차 무파업에 흔들

요즘 민주노총의 파업 현장은 예전과는 완전 딴판이다. 금속노조 한진중공업 노조지회가 올해 장기간 파업을 벌였지만 동조파업에 나선 노조는 없었다. 해고자를 구하자며 여러 차례 시동을 건 '희망버스'도 금속노조 간부보다는 시민단체와 일부 정치인들이 주도하는 양상이었다. 최근 치러진 금속노조 위원장 선거에선 온건노선의 박상철 씨가 단독출마했다. 뚜렷한 경쟁인물이 없기도 했지만 산별노조위원장에 대한 관심이 떨어진 때문이다.

연례행사처럼 벌어지던 금속노조의 연대파업도 자취를 감추고 있다. 금속노조는 지난 6월 하순 총파업 투쟁에 나서기로 결정했지만 행동에 옮기지 못했다. 그동안 파업을 주도했던 현대차와 기아차노조가 무분규 사업장으로 변신했고 다른 사업장들도 투쟁에 등을 돌렸기 때문이다. 불과 2~3년 전만 해도 현대 · 기아차노조가 앞장서면 민주노총 전체의 투쟁열기가 달아올랐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금속노조 파업 때마다 허리를 떠받쳐왔던 쌍용자동차 · 발레오전장 · KEC · 대림자동차 · 상신브레이크 등 강성노조들이 잇따라 민주노총을 탈퇴하면서 노조 간부들은 더욱 위기를 느끼고 있다.

조직의 사활을 걸고 노조법 재개정 투쟁을 강력히 벌여왔던 한국노총도 요구사항을 관철시키지 못해 피로감에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한국노총은 내년 총선까지 반(反)MB 투쟁을 이어가겠다고 공언하고 있지만 현장의 관심도는 뚝 떨어져 있어 분위기를 돌릴 묘안을 찾느라 고심 중이다.

◆조합원들,이념투쟁에 등돌려

노동운동의 변화는 적자생존을 강요하는 글로벌 경제환경이 가장 큰 원인으로 꼽힌다. 기업들마다 살아남기 위해 치열한 경제전쟁을 치르는 상황에서 노동계의 이념투쟁,정치투쟁은 국민들과 일반 조합원들의 비난만 사고 있다. 현대차노사의 3년 연속 무분규 타결은 노조위원장의 실용주의 리더십과 만족할 만한 보상이 큰 역할을 했지만 무엇보다 시대흐름에 맞는 노동운동을 요구하는 현장 조합원들의 목소리가 높아진 때문이다.

여기에 MB 정부의 '법과 원칙'에 따른 대응이 투쟁만능주의에 철퇴를 가하고 있다. 공공부문의 투쟁을 이끌어왔던 철도공사노조의 경우 단협 해지에 반발하며 불법파업을 벌이다 대량징계와 손해배상금이 부과되면서 조직력이 약해졌다. 전공노와 전교조도 정치자금법 위반 노조원에 대한 징계 등으로 투쟁력이 급속히 위축되고 있다.

사회양극화 역시 노동운동의 패러다임에 새로운 변화를 강요하고 있다. 저임금의 비정규직,중소영세기업 근로자가 90%를 차지하는 상황에서 고임금 · 대기업 노조원들의 투쟁은 '귀족노조의 배부른 파업'이란 비난을 받고 있다. 최영기 경기개발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노동운동이 여전히 1987년식 투쟁 중심의 성공신화에 취해 있는 측면이 있다"며 "시대가 바뀐 만큼 새로운 노동운동을 펼쳐야 노조도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윤기설 노동전문기자 upyk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