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데스크] '신라면블랙'을 위한 변명
국내 가공식품 시장엔 포장지 리뉴얼(개선)을 포함해 연간 2000여개의 신제품이 쏟아진다. 새 제품에 대한 소비자 반응은 크게 두 가지다. "어,맛있는데…"와 "좀 비싼데…"로 대별된다. 전자가 많으면 시장에서 무리없이 자리잡는다. 후자가 다수일 땐 채 반년도 못 견딘다. 인기를 좀 끈다 싶으면 얼마 안 가서 모방 제품까지 밀려드는 상황이고 보면 말 그대로 '정글'이다.

이달 초 국내 시장에서 사라진 '신라면블랙'.농심은 고급(프리미엄) 라면시장을 열겠다고 호언했지만 5개월도 안 돼 손을 들었다. "3년 간의 연구 · 개발(R&D)을 거친 야심작"이라던 농심의 주장도 무색했다. 식품업계의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것"이라는 의견이 많았다. 농심이 사업 포기의 이유로 밝힌 '마케팅 실패로 인한 판매 부진'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적어도 식품업계엔 드물었다. 경쟁사조차 이 제품의 퇴출 과정을 석연치 않게 봤다.

지난 5개월간을 들여다 보면 신라면블랙의 퇴진에 시장 외적인 요인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지난 4월 첫 선을 보인 신라면블랙에 대한 소비자 평가는 "어,맛있는데…"가 많았다. '물가 파수꾼'을 자처한 공정거래위원회는 달랐다. 기존 신라면에 비해 두 배가량 비싼 게 화근이었다.

농심은 연구개발비 설비투자비 등을 감안한 가격 책정이라고 해명했지만 먹혀들지 않았다. 공정위는 '설렁탕 한 그릇의 영양을 그대로 담았다'는 광고가 허위 · 과장됐다고 판정,과징금까지 물렸다.

공정위의 '낙인 효과'는 컸다. 출시 1개월 만에 90억원의 매출을 올리며 히트상품 반열에 올랐던 신라면블랙의 지난달 매출은 20억원으로 곤두박질쳤고,농심은 국내 사업을 전격 중단했다. 나름대로의 가격 논리와 마케팅 전략이 무한 경쟁하는 '정글'을 제대로 지나가 보지도 못했다.

신라면블랙 퇴출의 후유증은 적지 않다. 제대로 된 시장평가도 받아보지 못한 채 경제 외적인 요인에 의해 간판을 내렸다는 점에서다.

얼마 전 만난 한 식품업체 대표는 "1970년대에도 이러진 않았을 겁니다. 지금 시장기능이 작동이나 하고 있는 겁니까"라고 되물었다. 앞뒤 가리지 않고 제품 값을 누르고 보자는 식의 정부 압박에 대한 불만이 섞여 있었다. "김동수 공정위원장 체제 아래에서는 프리미엄 제품 개발을 포기해야 한다"(유업계 관계자)는 목소리도 나온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스태그플레이션의 우려가 커진 상황이다. 범정부 차원의 물가 안정 노력은 당연히 있어야 한다. 공정위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상식이 통할 정도의 여지는 남겨둬야 한다. "(식품시장에서) 공포 정책만 횡행하고 있다"(제과업체 임원)는 인상을 줘서는 정책이 먹힐 리 없다. 내년 중 · 후반 현 정권의 힘이 약해졌을 즈음,억눌렸던 가격 인상이 일시에 터져나와 더 큰 혼란이 빚어질 것이란 걱정까지 나오는 마당이다.

지난주 예상하지 않았던 뉴스가 이어졌다. 농심이 신라면블랙 사업을 해외에서 재개한다는 것이다. 미국과 중국에선 현지 시설투자를 통해 자체 생산에도 들어갔다. 결과적으로 공정위는 국내 투자를 해외로 밀어낸 모양새가 됐다. "어,맛있는데…"라고 한 국내 소비자들도 외국 여행을 가서나 신라면블랙을 맛볼 수 있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