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희 칼럼] 5세 공통과정에 꼭 넣어야 하는 것
호주에 사는 친구가 있다. 대학 강의를 그만두고 상담교사 자격증을 따 초등학교 보조교사로 일하는 그는 한동안 교실에 들어갈 때마다 놀랐다고 말했다. 수업시간 절반 이상을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가르치는 데 할애한다는 사실이 몹시 낯설었다는 것이다. 누군가 말썽을 피우면 교사가 데리고 나가 타이른 다음 함께 들어온다고도 했다.

국내에서 그랬다간 한바탕 난리가 날 가능성이 높다. '공부나 가르치지 뭐하는 수작이냐'는 항의가 빗발칠 수도 있다. 진도 나가기도 바쁜 판에 지식과 별개인 사람 사는 도리를 일깨워주는 일 자체가 애당초 무리한 건지 모른다. 이미 마음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데 익숙해진 아이들을 다스릴 방법이 없는 지금 같은 상황에선 더더욱 그렇다.

'세살 버릇 여든 간다'거나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고 하거니와 사고방식과 가치관은 만 세 살,늦어도 초등학교 입학 전에 대부분 결정된다는 게 통설이다. 명예 · 용기 · 의무 · 헌신 같은 사람의 기본 도리는 물론 염치와 배려 같은 사고의 밑바탕 또한 어릴 때 보고 듣고 느끼고 배운 것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는 얘기다.

사정이 이런데 우리는 가정과 유치원 어디에서도 국민 내지 사회의 일원으로 명심해야 할 책무에 대해 제대로 일러주지 않는다. 많은 부모들이 아이가 공공장소에서 악을 쓰고 울어도,식당에서 뛰어다녀도,공중 목욕탕에서 텀벙거려도 그냥 내버려둔다. 유치원도 다르지 않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영어 · 수학 등에 집중하느라 다른 건 몰라라 한다.

이러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목표는 하나로 집약되기 십상이다.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에 가고 결과적으로 남보다 잘사는 것'이 그것이다. 공부는 모든 가치에 우선하고,성적만 좋으면 태도에 상관없이 집과 학교 어디서든 대접받는다. 명문 의대생들이 6년을 함께 공부한 동기 여학생을 성추행했다는 데서 보듯 성적과 인성은 비례하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머리 좋고 공부 잘하기로 소문 났었다는 이들, 그 중에서도 특히 고위 공직에 오른 이들이 보통사람도 부끄러워 얼굴을 못들 일을 저지르고도 세상을 제 것처럼 호령하고 사는 까닭이다. 위장 전입과 부동산 투기를 밥 먹듯하고도 "개발시대의 산물이니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장관들을 보는 국민에게 윤리와 도덕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가치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저축은행 사태는 최악이다. 칡넝쿨도 아니고 날이면 날마다 누가 누구 돈을 받고 누구와 어떻게 얽혔다고 튀어나온다. 지연과 학연의 고리가 단단하고 끈끈한 줄 짐작은 했지만 실제는 상상을 초월하는 모양이다. 외밭에선 신발끈도 고쳐매지 않는다는데 업무상 연관될 게 뻔한 이들과 얽히고 설킨 정도를 넘어 함께 뒹굴었다. '하여가' 전성시대다.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알아도 그 정도 편의쯤이야 여겼던 걸까. 징그럽다. 그러나 개인의 영달과 치부를 위해 수단방법 안가리는 그 잘난 이들의 분탕질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가 무너지지 않는 건 고단한 현실 속에서도 염치를 알고 도리와 의무를 지키면서 살고자 애쓰는 성실한 사람들 덕이다.

정부가 내년부터 실시하기로 한 '만 5세 어린이 공통과정'에 주목하는 건 바로 이런 까닭이다. 5세 어린이 공통과정은 유아교육(유치원)과 보육(어린이집)으로 양분돼 말도 많고 탈도 많던 과정을 통폐합해 어디서든 같은 과정을 가르친다는 것이다. 7월까지 공통과정을 마련해 내년 2월 담당교사에 대한 연수를 실시하고 3월부터 어린이집과 유치원에 적용하겠다는 방침이다.

가구 소득에 관계없이 1인당 월 20만원씩 주자면 내년에만 1조원의 추가비용이 필요하다고 한다. 엄청난 세금을 들여 시작하는 일이다. 지식도 좋지만 사람사는 도리와 염치부터 가르칠 일이다.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운다고 하지 않던가.

박성희 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