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 전 국보 1호 숭례문이 생방송으로 중계되는 눈 앞에서 잿더미로 변해가던 허망한 모습이 오버랩된다. 이번 일본의 지진 참사로 후쿠시마 원전들이 세계가 지켜보는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파괴돼가는 현장을 보면서 원자력 연구에 몸담아온 한 사람으로서 좌절감이 엄습한다. 예상을 뛰어넘는 강도의 지진과 해일이 원인이라지만 그동안 현대 안전기술의 총합체라는 원전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기에 더할 것이다.

이번 사태 전까지만 해도 원자력발전은 인류가 직면한 기후변화 문제에 도움을 줄 수 있는 하나의 대안으로 인정돼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하는 듯했다. 더구나 우리는 1년여 전 아랍에미리트(UAE)에서 한국형 원전 건설을 수주함으로써 우리 원전기술에 대한 자부심이 한껏 고양된 분위기였다. 원전은 에너지 부존자원이 거의 없는 우리나라로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고 대한민국의 위상을 지금 자리로까지 끌어올린 밑거름이기도 했다. 그것은 지금까지도 원전에 위험이 있음을 몰라서가 아니라 알면서도 선택한 타협의 결과였다.

여러 나라에서 원전 정책을 재검토하겠다는 발표가 이미 나오고 있다. 그러나 10m 높이의 쓰나미 피해가 저렇게 처참했다고 해서 인류가 해안도시를 버릴 수 없는 것처럼,원전에 사고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원전을 포기할 수 없음도 명백하다. 잃는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결국 안전과 실익 사이에 저울질은 계속될 것인데,문제는 원전 안전성을 어느 수준에 맞춰야 하는가에 고민의 초점이 있다.

안전과 위험은 상대적인 것이어서 절대적 경계선이 없다. 쉬운 말로 안전할수록 좋고 이상적인 것이지만 현실적으로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가용자원을 투입하는 데 한계가 있다. 한 종류의 위험을 낮추는 데 자원을 무리하게 집어넣다 보면 더 큰 다른 위험을 낳을 수도 있다. 사회 전체의 위험은 합리적으로 줄어들지 않는다는 얘기다.

원전 위험으로 범위를 좁히더라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지난 2월 뉴질랜드에서 일어난 규모 6.3의 지진에 비해 이번 일본의 지진 규모는 9.0이다. 이 차이는 에너지 세기로 말하면 약 1만배에 해당한다. 그렇다고 위험관리 차원에서 원전을 지금보다 1만배 강도로 건설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비용과 효과 간 균형을 따질 문제다.

원전에는 우리가 미처 대처하지 못할 위험 요인이 있다. 원전 설계에서 지진이나 해일의 위협을 당연히 고려하지만,그로 인해 전력과 용수가 총체적으로 상실될 상황을 상상하지 못했기에 이번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원자로는 가동을 정지한 뒤에도 잔류열이 가동 당시의 6% 정도가 방출된다. 후쿠시마 2호기의 경우 열출력이 2000㎿이므로 대략 120㎿(12만㎾)의 잔류열이 나온다. 우리가 가정에서 쓰는 전열기가 1㎾ 정도이므로 작은 원자로 안에 12만개의 전열기가 들어가 있는 셈이다.

원전 안전의 핵심은 잔류열 관리에 있다. 후쿠시마 원전도 잔류열을 억제하려고 노력해왔다. 현실적인 방법은 냉각밖에 없다. 후쿠시마 원전은 이 냉각수 공급에 차질을 빚으면서 피복관이 과열돼 수소가스가 산화반응을 일으키면서 폭발한 것이다.

원전 안전을 위협하는 요인을 세심하게 찾아내 대비할수록 원전 안전도는 높아진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관점을 가진 사람들의 견해가 중요하다. 폐쇄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고 종종 비난받는 원자력 전문가들끼리만 고민하는 것보다는 건설을 비롯해 환경,디자인 등 다양한 분야의 목소리를 들으면 새로운 사실을 발견할 가능성이 커진다. 현재 환경영향에 대해서만 제한적으로 이뤄지는 공청제도를 원전 안전성 자체로 넓히는 방안을 검토해야 할 때다.

이재기 < 한양대 원자력 공학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