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무제 때의 관리로서 성품이 강직하고 원칙을 지키며 처신하는 이가 있었다. 급암의 자는 장유(長孺)이며 복양 사람이다. 그의 조상은 옛날 위나라 군주에게 총애를 받아 급암에 이르기까지 일곱 대에 걸쳐 경이나 대부를 지낸 가문이다.

급암은 아버지의 추천으로 경제 때에 태자세마(太子洗馬)가 됐다. 단정하고 엄숙한 태도 때문에 사람들이 어려워했다. 중앙 정부에서 밀려나 지방에 나가 정치를 하면서 파당을 만들지 않고,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데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급암이 황제를 보필하는 방식은 이런 것이었다. 한번은 효무제가 동월을 비롯해 주변 나라들이 시끄럽게 싸운다는 소문을 듣고 급암을 보내 실태를 파악하도록 했다. 그런데 그는 오나라까지만 갔다가 되돌아와서는 이렇게 말했다. "월나라 사람들이 싸우는 것은 본디 그들의 습속이므로 천자의 사자를 수고롭게 할 만한 게 못 됩니다. " 자칫하면 큰 일을 당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하남 지방에 불이 나 가옥 1000여 채가 탔는데,황제의 명을 받들고 파견된 그는 허락도 없이 하남의 곡식창고를 열어 가난한 백성을 구제하고 돌아와서는 황제의 명을 어긴 벌을 달게 받겠다고 했다. 이 정도로 그의 소신은 뚜렷했다. 이를 좋게 본 무제는 급암을 중대부로 승진시켰다.

그러나 급암의 강한 소신은 가끔 무제를 부담스럽게 만들었다. 원칙을 강조하면서 어느 때나 무제에게 직언을 해대니 그럴 만도 했다. 결국 동해군 태수로 좌천된 그는 그 지역을 잘 다스려 백성들의 신임을 얻고 주변 군현까지 명성을 드날렸다. 그러자 무제는 급암을 다시 중앙으로 불러들여 곁에 두었다.

무제는 내심 급암이 좌천의 쓴맛을 보았으니 좀 누그러지지 않을까 기대했다. 하지만 기대는 오래가지 않았다. 본성은 바뀌지 않는 법이다. 급암은 과시욕이 있는 무제에게 "겉으로만 인의를 베푸는 위선을 그만두고 요순시대의 참 정치를 마음속 깊이 본받으시라"고 직간하면서 세게 몰아붙였다.

희한한 일은 급암을 시샘하는 신하들이 의외로 드물었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못하는 직언을 마음대로 하는 그를 보며 오히려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듯했다.

급암의 기준은 분명했다. 조정의 이권이 걸린 문제에 대해서는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이른바 돈에 관한 것은 제쳐두고 오직 황제와 국가 안위 문제에만 관심을 두었던 것이다.

무제가 의관을 갖추지 않고 침대에 걸터앉아 공무를 보거나 관을 쓰지 않고 정사에 임할 때도 있었는데,멀리서 급암이 오는 게 보이면 급히 장막 뒤로 몸을 피할 정도였다.

한번은 급암이 자신보다 늦게 조정에 들어온 자들이 출세하는 것을 보고 무제를 찾아가 옳지 않다고 따졌다. "폐하께서 신하들을 등용하는 것은 장작을 쌓아올리는 것과 같습니다. 뒤에 온 사람이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사기》 급정열전)

황제의 인사권을 노골적으로 건드린 것이다. 어찌 보면 자신보다 먼저 승진하는 자들을 비난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는 얘기였다. 그는 헐벗고 힘 없는 백성들을 위해 따뜻한 마음으로 정치를 펼쳤지만 절대권력자에 대해서는 한없이 뻣뻣했다. 무제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는 어사대부 공손홍에게도 '위선으로 가득찬 행동을 일삼는 자'라고 호된 비판을 가한 호걸다운 인물이었다.

훌륭한 참모라면 때로 자신이 모시는 최고 경영자가 욕망에 사로잡혀 있거나 겉으로 위선을 일삼을 때 이처럼 과감한 직언의 카드를 들이댈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김원중 < 건양대 중국언어문화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