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세사 제조 수출업체인 웰크론의 전상윤 과장(34)은 2년 전 미국 시장을 뚫으라는 특명을 받고 뉴욕에 부임했다. 뉴저지 엥글우드에 있는 KOTRA 뉴욕비즈니스인큐베이터 한쪽에 둥지를 틀었다. 경기 침체 후유증으로 시장이 위축된 탓도 있었지만 바이어를 어디서 어떻게 만나야 할지 막막했다.

웰크론은 미국 서부 지역에는 제품을 꾸준히 수출해 왔지만 동부 지역에는 아무런 마케팅 연고가 없었다. 그래서 제품을 팔아줄 세일즈렙(중간 유통업자)을 찾는 한편 스스로 청소용품 업체와 병원 등을 방문하기로 했다. 구매 담당자와 미리 약속한 뒤 찾아가는 그런 방문이 아니다. 무작정 가방에 샘플을 넣고 구매 담당자를 찾아 나섰다. 전 과장은 작년 한 해 동안에만 뉴욕과 뉴저지 일대 청소용품 업체 340곳을 방문했다. 발품을 팔아 50마일 이상 달려가도 담당자를 만나지 못하고 허탕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민간 쪽 마케팅과는 별도로 전 과장은 KOTRA의 지원을 받아 극세사 제품을 납품할 수 있는 공공부문 조달 루트 조사에 착수했다. 지방 정부가 운영하는 공공기관 납품 시장을 조사하던 중 뉴욕시 산하 장애인직원알선센터에서 지하철과 도서관 등에 극세사 제품을 납품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후 1년 동안 샘플을 제공하고 상담하면서 공을 들였다. 현재는 계약 체결을 기다리는 중이다. 전 과장은 "미국 마케팅은 철저히 네트워크 중심으로 이뤄지는 만큼 제품 납품을 도와줄 벤더를 찾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웰크론은 공공기관 납품을 위해 복수의 현지 조달 벤더와 협력 체계를 구축해 놓은 상태다.

중소기업들이 미국 시장 공략에 나서지만 자금과 인력 부족으로 현지 마케팅에 고전하고 있다. 구매 방식 등 비즈니스 방식이 확연히 다른 데다 문화 차이가 큰 탓에 판매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이에 따라 정부가 좀 더 체계적으로 중소기업들의 선진국 마케팅을 지원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보안카메라 제조업체인 동양유니텍의 안병직 이사(46)도 1년 넘게 미국 시장의 높은 벽을 매일같이 느끼며 살고 있다. 미국 마케팅을 위해 스카우트된 안 이사는 한국에 진출하려는 미국 벤처기업에 컨설팅 서비스를 제공할 정도로 미국 비즈니스 경험이 많은 편이다. 그는 안정적인 납품처를 찾기 위해 뉴욕 뉴저지 항만청을 뚫어볼 양으로 서너 달 동안 이곳 저곳을 뛰어다녔지만 허사였다.

현지 퇴직 공무원과 유대인들이 대부분의 시장을 좌지우지하고 있어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무엇보다 벤더 등록이 급선무였다. 하지만 벤더 등록 자격을 갖추려면 미국 시민권자여야 했다. 그래서 뉴저지 팰리세이즈파크에서 비정부기구(NGO) 활동을 하는 시민권자 교포를 영입해 어렵사리 벤더로 등록했다.

안 이사는 카메라와 같은 전자제품은 규격과 매뉴얼 문제로 난관에 부딪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라고 전한다. 초기 납품 물량이 많지 않은 상황에서 구매자의 요구를 회사 측에 전달하는 데도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다. 그는 미국에서 마케팅을 하려면 구매자들이 편하게 볼 수 있도록 웹사이트를 만들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안 이사는 "미국 시장 공략은 시간과 인내력을 바탕으로 판매 채널을 확보하는 게 중요하다"며 "장기적인 안목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 시장의 높은 벽을 실감하고 발을 빼는 곳도 있다. 출판사 다산북스는 문화 콘텐츠로 미국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2년 전 뉴욕에 법인을 설립했다. 1년 동안의 현지 마케팅 결과 작년 3월 뉴저지 포트리 초등학교가 영어로 만든 오바마 위인전 등을 교재로 채택하는 성과를 거뒀지만 매출이 예상보다 늘지 않자 미국 시장에 대한 직접 마케팅을 사실상 중단하기로 했다. 이 회사 우재오 팀장(35)은 교육용으로 좋은 반응을 얻자 뉴욕시 및 뉴저지주 일대 학교 도서관 등과 지속적으로 상담을 진행해 왔지만 실질적인 책 판매로 이어지는 데는 적지 않은 어려움이 따랐다. 아마존닷컴,반스앤드노블 등에서 위인전 시리즈를 판매하고 있는 다산북스는 딜러를 선정해 미국 시장을 공략하기로 마케팅 전략을 바꿨다.

최광수 KOTRA 뉴욕비즈니스인큐베이터센터장은 "자금과 조직력이 크게 부족한 중소기업이 미국에서 마케팅을 하기 위해서는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가 불가피하다"며 "4~5년 동안 지속적인 노력을 통해 네트워크를 구축하겠다는 마음으로 미국 시장을 공략해야 한다"고 말했다.

웰크론의 전 과장은 "효율적인 중소기업의 해외 마케팅을 위해 정부가 좀 더 체계적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뉴욕=이익원 특파원 ik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