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가 지난해 예산심의는 뒷전으로 밀어놓은 채 9000억원의 예산만 몰래 나눠먹은 사실이 뒤늦게 확인됐다. 국회의원들이 본연의 임무인 예산심사는 하지 않고 정쟁만 일삼으면서도 뒷전으론 표(票)를 의식한 예산 따먹기에만 신경썼다는 비판이 나온다.

5일 복수의 국회 관계자에 따르면,지난해 국회는 4대강 살리기 사업을 둘러싼 여야 이견으로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서 2010년도 예산안을 한번도 제대로 심사하지 못했다. 여당은 예결위 계수조정위원회를 구성했지만 야당은 4대강 예산 전액삭감을 외치며 장외투쟁을 하느라 계수조정소위에 참여하지 않았다. 결국 국회는 지난해 마지막 날까지 대치하다 한나라당이 새해 새벽 본회의에서 예산안을 단독 처리했다.

문제는 여야가 극한 대치 상황에서도 정부로부터 9000억원의 예산을 넘겨받아 지역구 사업을 챙겼다는 점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여당 의원은 "국회의 예산심사가 교착상태에 빠지자 정부는 12월 중순께 한나라당에 5000억원,민주당에 3000억원,비교섭단체에는 1000억원의 예산을 각각 배분했다"고 말했다. 각 당은 이 '백지수표'로 지역구 의원들의 민원사업을 일일이 챙겨줬다는 게 이 의원의 전언이다.

다른 여당 의원도 "예산심사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 상황에서 민원은 풀어야 하니 별다른 수가 없었다"면서 "각 당이 지역구 의원들로부터 민원 리스트를 받아 배정받은 예산 한도 내에서 각 의원들에게 예산을 골고루 나눠줬다"고 말했다. 또 다른 야당 의원은 "보통은 계수조정소위 소속 의원들이 동료 의원들의 민원을 받아 지역구 사업 예산을 챙겨주지만 작년에는 민주당 계수조정소위 자체가 구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배정받은 예산을 갖고 기획재정부 예산담당 관료들과 직접 협의하면서 예산을 짰다"고 말했다. 대외적으로는 4대강 사업 전면 중단을 외치며 예산 국회를 보이콧하던 야당도 뒤에선 정부로부터 예산을 배정받아 열심히 지역구사업 예산을 챙겼다는 얘기다.

재정부 고위 관계자는 "지난해엔 여야 의원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예산을 별도로 심의했다"면서도 '9000억원의 민원해결 예산을 나눠줬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노 코멘트'라며 언급을 회피했다. 그러나 다른 관료는 "수십년 국회의 예산심의 과정을 지켜봤지만 작년 같은 사례는 처음이었다"면서 "있을 수도,있어서도 안되는 일이 벌어졌다"고 말했다.

이 같은 예산 나눠먹기로 2010년 세출예산은 정부가 제출한 291조8000억원보다 1조원 늘어난 292조8000억원으로 확정돼 국회를 통과했다.

박수진 기자 notwom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