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청춘을 통곡하며 누워 있노라.'

고흥반도의 서남쪽 끝 녹동항 앞바다,저 편엔 면적 4.42㎢밖에 되지 않는 작은 섬 소록도가 있다. 한센병 환자들이 강제 수용되기 시작한 1916년 이래 천형의 땅이 돼버린 섬이다. 소록대교를 건너 국립소록도병원으로 가는 길은 '수탄장(愁嘆場)'이라 불리던 길이다. 미감아인 자식과 한센인 부모가 한 달에 한 번씩 먼발치에서 눈으로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아픔이 서린 곳이다.

맨 먼저 나그네를 맞는 것은 해방 직후 자치권을 요구하다 처참하게 학살된 84명을 위한 추모비다. 56년이나 흐른 뒤에야 세워졌다니 피해자들의 신원(伸寃)이 너무 늦은 건 아닌지.1916년에 문을 연 국립소록도병원 본관은 리모델링 중이다.

중앙공원을 향해 올라가자 소록도갱생원 감금실과 검시실이 나온다. 붉은 벽돌 담 안에 쇠창살을 단 감금실 건물은 교도소를 방불케 한다. 검시실은 일본인들이 한센병 환자들을 대상으로 정관 수술과 시체 해부를 했던 곳이다. 안으로 들어가자 당시의 수술대 · 검시대 · 세척 시설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단종대(斷種臺)가 있는 옆방 벽에는 이동(李東)이란 사람의 '단종대'라는 시가 걸려 있다. '여기 나의 25세 젊음을/ 파멸해 가는 수술대 위에서/ 내 청춘을 통곡하며 누워 있노라/ 장래 손자를 보겠다던 어머니의 모습/ 내 수술대 위에서 가물거린다. '

소록도자료관 제2실에는 한센병 환자의 수술 · 시술기구들과 처치에 필요한 기구들이 전시돼 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섬뜩한 느낌이 들 정도다. 공원 중앙에는 '한센병은 낫는다'는 문구가 쓰인 구라탑(救癩塔)이 서 있다. 1963년 국제워크캠프 남녀 대학생 133명이 도덕면 오마도 간척지 근로봉사를 기념해 세운 탑이다. 이청준의 소설 《당신들의 천국》의 배경이 된 오마도는 한센인들에게 또 다른 상처를 안겨준 곳이다.

구라탑 위쪽엔 수형이 멋진 반송들에 둘러싸인 한하운의 '보리피리' 시비가 육중한 몸을 누인 채 쉬고 있다. 한센인들이 목도를 메 옮겨온 이 돌은 '메도 죽고 놓아도 죽는 바위'였다.

'…보리피리 불며/ 인환의 거리/ 인간사 그리워/ 피-ㄹ닐리리.// 보리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 눈물의 언덕을 지나/ 피-ㄹ닐니리.'

초등학교 시절 늦은 봄 하학길에서 보릿대를 꺾어 피리를 만들어 불어보곤 했다. '뻬에~ 뻬에~' 배고파 우는 아기를 닮은 보리피리 소리는 멀리 가지 못했다. 인간세상을 향한 시인의 그리움이 멀리 가지 못했듯이.시비 바로 앞,안내판이 서 있는 곳은 강제노역을 시키고 환자들한테서 거둔 돈으로 자신의 동상을 세워 참배케 하다가 환자에게 살해당한 제4대 수호원장의 동상이 있었던 자리다. 그가 저질렀던 온갖 악행은 저 안내판 하나로 남은 셈인가.

공원 안에는 일본 · 대만 등지에서 들여왔다는 반송 · 나한송 · 실편백 · 황금편백 등 희귀 수목들이 지천이다. 그러나 강제노역으로 이룩한 공원의 아름다움은 한센인들에겐 그저 '당신들의 천국'일 뿐이다.

◆해산물 집산지 녹동항에서 고흥읍까지

1160m 길이의 소록대교를 걸어서 건너 녹동항에 닿는다. 파라솔 한 개 보이지 않는 건너편 소록해수욕장이 공(空)의 세계를 구현하고 있다. 녹동항은 인근 섬에서 생산되는 활어와 김,미역,다시마,멸치 등 해산물이 집결하는 곳이다. 수협 수산물유통센터로 발길을 옮긴다. 생선 가게 아저씨는 요즘엔 붕장어 · 병어 · 돌문어가 많이 잡힌다고 귀띔한다. 병어를 가득 담은 상자가 계속 들어온다.

젊은 날 군산 째보선창가 막걸릿집에서 병어회와 더불어 세월을 낚은 바 있는 내게 병어는 특별한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안도현의 '병어회와 깻잎'이라는 시는 병어회 먹는 법을 가르쳐준다. '군산 째보선창 선술집에서 막걸리 한 주전자 시켰더니 병어회가 안주로 나왔다/그 꼬순 것을 깻잎에 싸서 먹으려는데 주모가 손사래치며 달려왔다/ 병어회 먹을 때는 꼭 깻잎을 뒤집어 싸먹어야 한다고,그래야 입 안이 까끌거리지 않는다고.'

꼬막 같은 작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고흥읍,옛 관아인 존심당을 찾아 군청으로 향한다. 수령과 관리들이 근무를 하던 존심당은 내삼문 형식인 고흥아문의 안쪽에 있다. 지붕 모서리 선자서까래가 아름다운 앞면 5칸 · 옆면 3칸 크기의 팔작지붕 집이다.

군청 뒤 비탈길을 따라 흥양현읍성으로 간다. 읍성은 군사 · 행정 기능을 함께 수행하는 성이다. 평지와 산기슭에 걸쳐 쌓은 흥양현읍성은 조선 초기 읍성이다. 성벽은 아래에는 큰 돌을 놓고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작은 돌로 쌓은 형태다. 서 · 북벽 높이 6m×폭 4m,약 300~400m가량이 남아 있다. '복원'의 손길을 타지 않아선지 석축의 아름다움이 오롯이 살아 있다.

성안 서쪽에는 기념물로 지정된 14m 높이의 곰솔(海松)이 당당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곰솔은 염분에 강해 바닷바람을 막아주는 방풍 · 방조림으로 많이 심는다. 성 안의 물이 흘러나가는 수구문을 찾아서 고흥천으로 간다. 고흥천엔 2기의 무지개 다리가 놓여 있다. 웃홍교나 아랫홍교나 정상이 지면보다 훨씬 높다. 아마도 다리와 성벽의 높이를 수평으로 맞춰서 성벽에서 다리로 곧장 건너다닐 수 있도록 한 모양이다.

◆마음의 여래지(如來地)로 삼고 싶은 팔영산

여덟 개의 산봉우리가 부채처럼 펼쳐진 팔영산(608m) 능가사로 '고고싱'이다. 천왕문을 들어서자 목조사천왕상이 나그네를 맞는다. 서방광목천왕은 뱀을 쥔 특이한 모습이다. 라마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조선시대의 뛰어난 주종장 김애립이 제작한 동종(보물 제1557호)을 들여다보러 범종각으로 발길을 옮긴다.

4구의 보살입상이 유려한 모습으로 부조된 종신에는 '화주(化主) 목현의 수명이 늘어 마땅히 극락정토에 태어나시기를 빈다(化主木賢增朴壽當生淨刹)'는 명문이 새겨 있다. 햇빛 아래 온전히 드러난 문양들의 선이 매우 곱다. 정면 5칸,측면 3칸 크기의 대웅전(보물 제1307호)은 기둥머리에 끼워서 공포를 받치는 부재인 안초공(按草工) 수법과 건물 내 · 외부에 연꽃봉오리를 본뜬 연봉 장식이 아름다운 건물이다.

대웅전 몇 발짝 뒤엔 사적비가 있다. 거북받침돌 위에 비 몸을 세우고 구름과 용이 새겨진 머릿돌을 얹은 형태다. 비는 정현대사가 인도의 능가산을 본받아 절 이름을 보현사에서 능가사로 바꾼 내력을 적고 있다(天竺之南有所謂楞伽山者我東八影亦國之南也 爾其取).절 위,팔영저수지 위쪽,편백나무 숲에서 항균성 물질인 피톤치드를 포식한 다음 중산리지석묘군을 찾아나선다. 마을 뒷산 기슭에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고인돌들이 흩어져 있다. 저 아래 중산리 갯벌을 그리워하는 돌거북들이다.

이렇게 고흥반도는 길손에게 마지막까지 외롭고 높고 쓸쓸한 풍경을 보여준다. 어느 날엔가 삶의 번잡함에 지칠 때면 이 풍경들을 기억의 서랍에서 꺼내 오래도록 바라보리라.

안병기 여행작가


갈비탕 한 그릇에 여행피로 말끔!…나로우주센터도 들러볼까

맛집

고흥 동강면 사무소 인근 소문난갈비탕(061-833-2052).이 집의 메뉴는 무조건 갈비탕이다. 양이 큰 사람도 배부를 만큼 양이 푸짐하며 해장국같이 시원한 맛이 일품이다. 5000원,특갈비탕 7000원.

여행 팁

섬 여행을 하고 싶으면 녹동신항에서 거문도·백도·제주도행 배를 타면 된다. 우리나라에서 10번째로 큰 섬인 거금도로 가는 배는 녹동항에서 출항한다. 도선 시간=06:00,07:30,08:30,09:30,10:30,11:30,12:30,13:30,14:30,15:30,16:30,17:30,18:30,20:00(금진항) 06:30,07:40,09:00,10:00,11:00,12:00,13:00,14:00,15:00,16:00,17:00,18:00,19:00(신평항) 운임 1200원.

지난 7월 말 나로우주센터로 가는 길목인 고흥군 동일면 덕흥리(내나로도)에 지상 5층,지하 1층으로 문을 연 국립고흥청소년우주체험센터는 우주에 대한 청소년들의 궁금증을 풀어줄 창의적 체험 활동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프로그램은 일정과 대상별로 차별화돼 있다. 당일형과 1박2일 체험코스인 우주여행자 과정,2박3일 체험코스인 우주비행사 과정,3박4일 체험코스인 우주탐험가 과정,4박5일 체험코스인 우주지도자 과정 등 4개의 차별화된 기본과정으로 운영되며 1박2일 가족우주캠프도 운영한다. 예약 문의 (061)830-151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