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한씨 유족 국가 상대 소송 일부 승소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1부(황적화 부장판사)는 27일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 당시 남파간첩으로 지목된 김상한 씨의 부인과 자녀 등 7명이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국가는 유족에게 28억원과 지연 이자를 지급하라'고 원고 일부 승소로 판결했다.

재판부는 "국가가 김씨를 북파한 사실을 2008년 초까지 가족에게 알리지 않은 것은 명백한 의무위반"이라며 "김씨의 생사를 알지 못해 유족이 고통을 입었음이 명백한 이상 정신적 손해를 배상할 의무가 있다"고 밝혔다.

이어 "김씨가 특수임수를 위해 북파됐고 남파간첩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음에도 국가는 그가 간첩이라고 허위로 발표했고 이 때문에 유족이 신분상 불이익과 경제적 궁핍을 겪었을 것이라는 점도 인정된다"고 덧붙였다.

재판부는 손해배상 청구권이 소멸했다는 국가의 항변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수사 결과가 최초로 발표된 1964년부터 지연손해금을 계산해야 한다는 유족의 주장과 달리 북파 사실을 통지해 은폐를 종료한 2008년 2월을 기준으로 이자를 지급하도록 했다.

동아대 교수로 재직하다 사회대중당 후보로 민의원 선거해 출마했던 김씨는 1961년 반국가단체활동을 했다는 혐의(특수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 위반)로 지명수배됐다가 육군첩보부대(HID) 공작원으로 선발돼 1962년 7월 북파됐다.

그는 이후 연락이 끊겼으며 이듬해 4월 임무수행 중 전사한 것으로 처리됐다.

1963년 한일회담 반대 시위가 확산하면서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자 다음해 8월 중앙정보부는 `북괴의 사명을 품고 내려온 간첩인 김씨의 주도로 남한 내 공산주의자가 규합한 단체인 인혁당을 적발했다'며 제1차 인혁당 사건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정부는 이에 따라 관련자로 지목된 57명 중 41명 구속하고 16명을 수배했고 1965년 7명에게 유죄판결이 확정됐다.

하지만, 2005년 `국가정보원 과거사건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인혁당이 당(黨) 수준에 이르지 못한 서클 형태였던 만큼 국가변란을 기도한 반국가단체로 실재했다고 볼 수 없으며 북한의 지령과도 무관하다고 진상조사 결과를 밝혔다.

유족은 2008년 `국가가 정치적 이유로 수배당하던 김씨의 처지를 악용해 공작원으로 북한에 보냈으면서도 인혁당을 창당한 간첩으로 날조해 정부에 비판적인 인사를 탄압하는 수단으로 악용했다'며 75억원을 배상하라고 소송을 냈다.

(서울연합뉴스) 이세원 기자 sewonlee@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