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국가들의 재정 위기에 대한 불안감이 진정되고 미국 주가가 상승세를 재개하는 등 대외 환경이 호전되고 있다. 하지만 국내 금융시장에서는 안전자산 선호 현상이 계속되고 있다. 지속적인 금리 하락에도 불구하고 거액자산가들의 뭉칫돈은 주식이나 부동산시장보다 은행 정기예금으로 향하고 있다. 채권시장에도 시중자금이 몰려들고 있다. 부동산 시장이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주식시장에 대한 불안감도 여전해 투자자들이 돈을 보수적으로 운용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은행예금 1년 만에 최대 증가

은행 예금은 올 들어 시중자금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됐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정기예금과 수시입출금식 예금을 포함한 은행의 저축성 예금은 1월 21조5315억원 증가에 이어 2월에도 14조495억원 늘어났다. 이에 따라 지난달 은행권 수신은 전월 대비 16조9000억원 증가해 지난해 2월(23조1000억원) 이후 가장 큰 폭의 증가세를 보였다.

김현기 한국은행 통화금융팀 차장은 "각 은행의 고금리 특판 정기예금이 끝난 후로도 예금이 계속 증가했다"며 "은행들이 예대율을 낮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도 예금 증가의 한 원인"이라고 말했다.

한은의 기준금리 인상이 계속 미뤄지고 있는 것도 예금 증가의 배경으로 분석된다. 그간 금리 상승을 기대하고 예금을 미뤄왔던 고객들이 금리가 앞으로도 크게 오르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예금에 가입하고 있다는 것이다.

금리 인상에 대한 기대감이 약해진 것은 예금 회전율에서도 나타난다. 예금 회전율은 은행의 예금 지급액을 평균잔액으로 나눈 것으로 회전율이 높으면 예금 계좌의 입 · 출금이 빈번했다는 뜻이고 회전율이 낮으면 돈을 계좌에서 빼지 않고 묶어뒀다는 뜻이다. 지난 1월 정기예금 회전율은 0.2로 1년 전의 0.4에 비해 절반으로 떨어졌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금리 인상 기대감이 높았던 지난해에는 3~6개월 만기의 단기 예금을 하는 고객들이 많았지만 올 들어서는 대부분 예금 고객들이 만기를 1년 이상으로 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나 최근 예금 금리가 많이 떨어져 매력은 줄어들고 있다. 1월 초 연 5%를 넘기도 했던 주요 은행의 1년 만기 정기예금 금리는 이달 들어 연 3%대 후반~4%대 초반으로 하락했다.

◆채권 금리 하락세

채권 금리는 올 들어 하락세(채권 가격 상승)를 지속하고 있다. 3년 만기 국고채 금리는 1월 초 연 4% 중반에서 현재 연 3% 후반으로 떨어졌고 한동안 움직이지 않던 3개월 만기 양도성예금증서(CD) 금리도 이달 들어 두 차례 하락하면서 연 2.83%로 떨어졌다.

외국인 투자자들의 국내 채권 매수와 함께 은행들의 채권 매입이 금리 하락의 주된 배경으로 분석된다. 대출 수요 부진으로 자금을 운용할 곳이 없는 은행들이 늘어난 예금으로 채권을 사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주택 거래 침체와 총부채상환비율(DTI) 규제 등으로 주택담보대출마저 증가세가 둔화됐다"며 "대출 수요가 살아나기 전까지는 은행들의 채권 매입이 계속될 것 같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시중 자금이 채권시장으로 몰려들고 있지만 채권 투자에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하고 있다. 김창수 하나은행 아시아선수촌PB센터 팀장은 "신규 투자자의 경우 지금보다 채권 금리가 더 하락해야 채권 투자에서 수익을 낼 수 있다"며 "이미 금리가 많이 떨어져서 추가적인 하락 폭은 크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팀장은 "신용도가 낮은 기업의 회사채에 투자하면 정기예금 대비 2배 이상의 수익을 기대할 수 있지만 아직 기업 구조조정이 충분히 진행되지 않아 앞으로 한계 기업의 부도가 줄을 이을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소영 NH투자선물 연구원도 "채권시장이 과매수 국면으로 접어들었다"며 "차익 실현을 위한 매물이 나오면서 채권 가격이 조정을 받을 수 있다"고 예상했다.

◆주식시장에서는 자금 유출

예금,채권과 달리 주식시장에서는 자금이 빠져나가고 있다. 개인 투자자의 경우 직접 투자와 펀드를 통한 간접 투자 모두 줄이는 모습이다. 코스피 시장에서 개인 투자자는 지난달 중순부터 순매도를 하기 시작해 이달 들어서도 12일까지 2조2000억원 규모의 주식을 순매도했다.

주식형 펀드 설정액은 지난 1월 1조8343억원 감소에서 2월 1조2339억원 증가로 반전했다가 이달 들어 다시 감소세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국내 주식형펀드와 해외 주식형펀드에서는 지난 4일 이후 자금 순유출이 계속되고 있다. 염상훈 SK증권 애널리스트는 "주식과 펀드에서 자금을 빼 예금으로 옮기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관석 신한은행 WM사업부 재테크팀장은 "주가가 연중 지속적인 상승세를 보였던 작년과 달리 올해는 상승과 하락을 반복할 가능성이 높다"며 "적립식 펀드에 가입한 후 주가가 하락할 때마다 투자 금액을 늘리는 전략이 효과적"이라고 말했다.

유승호 기자 ush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