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류상 야근시간 꾸며놓고 탈나면 `오리발'
"철저한 감독으로 관행 바꿔야"


우리나라 기업의 야근 문화는 `후진적'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불법'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의 갖가지 떳떳하지 못한 수단을 동원해 직원들의 야근 시간을 축소하고 야근 수당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는 것이 관행처럼 굳어져 있다.

법무법인 한울의 이경우 대표 변호사는 "불법적인 야근 관행이 만연해 있지만 기업은 물론 감독 당국도 개선 의지가 별로 없어 보인다"고 말했다.

◇ 월 100시간 야근에도 "10시간만 입력해라"


야근 인정 여부를 놓고 회사 측과 갈등을 빚고 있는 거대 금융기관 계열사 직원 양모(34)씨의 경우는 국내 기업의 관행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양씨는 2년 간 거의 매일 밤 늦게까지 야근을 하다 폐결핵이 생겨 폐 일부를 잘라내는 수술을 받아야 했다.

수술 후 양씨는 산업재해 신청을 하려 했으나 회사 측은 이에 협조하길 거부했다.

이때 회사 측이 내민 것이 양씨의 근태 상황이 기록된 서류였다.

출근일수, 휴가일수, 조퇴 등 각 직원이 한달 간 근무한 상황을 기록한 이 기록부의 맨 끝부분에는 양씨의 초과근로시간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간은 대부분 월 10시간 안팎이었다.

"10시간 안팎일 수밖에 없지요. 매달 회사에서 시간외 근무시간을 일률적으로 정해 줬으니까요. 예를 들어 이번달 시간외 근무는 10시간 이내라는 지침이 내려오면 10시간 이상 기록할 수 없습니다. 한달에 100시간이 훨씬 넘게 야근이나 휴일 근무를 했지만 10시간 밖에 기록 못하는 거죠"

양씨의 말은 그와 같이 근무한 다른 직원의 말과도 일치한다.

A씨는 "매일같이 12시가 넘어 들어갔지만 사내 인사관리시스템에는 월 10시간 정도 밖에 입력할 수 없었다. 그 이상은 입력 자체가 안 됐다. 모든 직원이 마찬가지였다"고 증언했다.

매월 초 이 서류에 서명할 때마다 양씨는 별다른 생각 없이 서명했다고 한다.

하지만 회사 측과 갈등을 빚고 있는 지금은 왜 이런 서류가 준비됐는지 그 의도를 알 것 같다고 한다.

"노동부에 조사를 요청했더니 불리하다고 하더군요. 본인의 서명이 있는 서류니까요. 하지만 월급쟁이 가운데 위에서 들이미는 서류에 서명하지 않을 간 큰 월급쟁이가 있을까요. 그리고 한달에 100시간 넘게 초과근로를 시켜놓고 10시간 밖에 입력 못 하게 만든 것은 불법 아닙니까"

◇ "후진적 관행 이제는 바꿔야"

양씨가 겪은 일은 양씨 회사 만의 문제가 아니다.

상당수 대기업이나 금융기관이 한달 초과근로시간을 미리 정해놓고 직원들이 이 시간 내에서만 초과근로시간을 입력토록 하는 편법을 쓰고 있다.

편법이라기보다는 `불법'이라고 불러야 할 관행이다.

시중은행에 근무하는 정모(32)씨는 "한달 야근 시간이 12시간으로 정해져 있다. 사내 시스템에 그 이상 입력할 수 없다. 대부분 12시간 넘게 근무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물론 법적으로 모든 기업은 근로자의 야근에 대해 정당한 보상을 지급하도록 돼 있다.

근로기준법 56조는 `연장근로에 대해서는 통상 임금의 100분의 50 이상을 가산해 지급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야근을 시키려면 시간당 급여의 1.5배를 지급해야 한다는 의미다.

하지만 이를 그대로 지급하는 기업은 거의 없다.

온갖 편법을 동원해 야근 수당 줄이기에 급급할 뿐이다.

사문화된 조항인 것이다.

국내 기업에서 일하다 외국계 기업으로 옮긴 문모(38)씨는 "만약 직원이 수차례 지각을 하면 회사에서 바로 징계에 들어갈 것이다.

하지만 정작 회사 측이 줘야 할 야근 수당은 제대로 지급하지 않는다.

이것이 후진적인 기업 문화가 아니라면 무엇이 후진적인가"라고 말했다.

노무법인 의연의 서종식 노무사는 "대부분의 기업들이 야근 기록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고 야근 수당을 축소 지급하고 있지만 감독조차 하지 않고 있다.

OECD 국가 중 이런 나라는 우리나라 밖에 없을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철저한 감독 등을 통해 불법적인 관행을 바꾸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 안승섭 기자 ssahn@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