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광장이 열렸다. 이 공간이 보행자들에게 자유로이 열린 것은 아마 일제 강점기 이후 처음이 아닐까 한다. 오랜 세월 마음 놓고 탁 트인 광화문 앞을 거닐어 보는 것을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시민들은 광장이 열리자마자 수십만 명씩 몰려나와 그 땅을 밟아보고 뛰고 웃고 떠들고 돌아다니며 해방감을 만끽했다. 하지만, 광장이 개방되기 훨씬 전부터 긴장의 그늘은 이미 광화문 네거리의 공기 중에 떠돌고 있었다. 광화문 광장의 장소성이 보통 강렬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세계의 유수한 도시 중심부 중 어느 곳보다도 아름다운 자연풍광의 조망점을 가진 광화문 일대는 태조 이성계가 도읍을 정할 당시부터 도성을 둘러싸는 봉우리들을 모두 볼 수 있는 자리였다. 풍수지리에 정통했다는 무학대사가 한반도 중부에서 가장 강한 기가 모이고 조화로운 곳에 궁궐자리를 정했으며, 그 바로 진입부가 또한 광화문 자리다.

조선 권력의 정점인 왕의 정궁 앞인지라 광화문 앞은 범인들이 쉽사리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개인적으로 지나는 행인이 있을 수는 있었겠지만, 적어도 많은 사람들이 모이거나 움직임을 보이는 경우 그것은 곧 왕에 대한 발언, 즉 최고 권력에 대한 발언이자 정치적 행동으로 해석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제 일반 시민이 민주국가 권력 정당성의 근거가 되는 대중 민주주의의 시대가 열렸다. 민주적 가능성이 열리고 개방되었다는 것은 동시에 그것을 이용해서 권력을 만들고자 하는 모든 시도와 욕구가 열렸다는 것을 뜻했다.

오랫동안 국가는 광화문 공간을 열린 형태로 놔둘 수 없었다. 이 공간을 개방된 상태로 놔두고만 있기에는 그곳을 점유하고 자기 것으로 함으로써 가지게 될 '힘'의 가능성에 대해 사람들을 유혹하는 욕망과 파괴력이 너무 큰 것이었다. 그것은 곧 국가권력에 대한 위협이었다. 그래서 일제시대 이래 광화문 앞 넓은 거리는 자동차가 대신 메웠고, 그 결과 사람들의 보행과 모임과 대화와 산책과 활동은 원천적으로 봉쇄돼 왔었다.

그런데 얼마전, 실험의 용단이 내려졌다. 광화문의 일부 차로를 걷어내고 보행자들이 쉽게 걸어다닐 수 있는 열린 광장이 설치되었다. 광화문 광장의 정치적 파괴력을 알고 있는 도시정부는 이곳에 대한 정치적 목적의 활용을 제한하기로 했다.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광장이 개방된 지 채 사흘이 되지 않아 이 공간을 '정치 도구화'하고자 하는 욕구가 밀려들어왔다. 광화문 광장에서 정치적 집회를 허용하라는 집회 · 시위가 강행된 것이다. 광장을 자기의 것으로 하고 싶은 권력에의 의지, 그 유혹과 욕망은 이리도 강렬한가. 신사협정에 의해 양보되고 존중되는 최소한의 합의공간은 한국에서 이토록 존재하기 어려운가.

하기야 대의민주주의의 성전이라는 국회가 협상과 대화보다는 '벼랑끝 작전'으로 버티는,이쪽에 의해 점거되고 저쪽에 의해 부서지는 것이 오늘의 현주소다. 그러니 그보다 예측불가능한 변수가 많은 참여민주주의의 열린 광장이 조화롭게 열린 장소로 발전하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주사위는 던져졌다. 싫든 좋든 우리 모두는 이제 그 리스크를 안게 됐다. 이곳을 어떤 화단으로 꾸미든,음악회나 전시회들로 채우든,그 어떤 정치적 욕망의 진입을 막아내려는 시도도 그 자체로는 아직 미봉책일 것이다. 광화문 광장은 한국사회가 한 단계 더 성숙해지느냐, 그렇지 않으면 주저앉을 것이냐를 드러내는 실험실로,새로운 도전으로 우리 앞에 열렸다. 시원하게 열린 시민의 광장을 목말라해 온 우리,우리는 이 곳에 광장을 가질 자격이 있는가?

송도영 <한양대 교수ㆍ문화인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