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억500만원(2006년 말)→8억9500만원(2008년 11월 말)→12억9000만원(2009년 7월 초)'

서울 송파구의 재건축 대상 아파트인 잠실주공 5단지 112㎡(34평)형의 가격(부동산114 조사 기준) 움직임이다. 작년 말만 해도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공시가(8억5600만원)보다도 낮은 8억5000만원짜리 급매물이 나오기도 했지만 불과 7개월 만에 3억9500만원(44.1%)이나 뛰었다. 같은 단지 119㎡(36평)형도 최근 두 달새 2억원 가까이 올라 15억원에 매매됐다.

강남구 개포주공1단지 35.8㎡(11평)형의 최근 시세는 6억9000만원.정점이었던 작년 1월의 6억6000만원을 넘어섰다. 작년 말 5억4000만원까지 내려갔다가 올 들어 줄곧 올랐다. 올초 4억5000만원에 거래됐던 강동구 고덕주공 2단지 42㎡(13평)형은 요즘 5억7000만원 안팎에서 매물이 나온다. 최고점이었던 2006년 말(5억9900만원) 수준에 근접했다. 서울 목동과 경기 과천,분당 등지도 사정은 비슷하다. 몇 개월 사이에 수억원씩 올랐다.

본격적인 경기 회복은 아직 멀었는데 주요 지역 아파트값이 먼저 뛰는 이상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실물경기에 동행하거나 후행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집값이 경기에 선행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주가와 강남 재건축 아파트값

주가는 대표적인 경기 선행지표다. 통상 경기 흐름보다 6개월가량(길면 1년) 앞서 간다는 게 증권가의 정설이다. 경기가 회복되기 6개월~1년 전부터 기대심리가 반영돼 주가가 먼저 오른다는 얘기다.

종합주가지수(KOSPI)는 2007년 11월을 정점으로 하락하기 시작해 지난 2월까지 등락을 거듭하며 15개월 동안 하락했다. 2007년 11월 최고 2085.45(2007년 11월)까지 치솟았다가 금융위기의 한파가 몰아치던 작년 10월에는 892.16까지 추락했다. 최고점 대비 57%가량 빠졌다. 그러나 주가는 3월 초부터 상승세로 돌아서 1400선을 훌쩍 넘어섰다.

주가 움직임만 놓고 보면 경기가 이르면 올 가을이나 내년 봄쯤 회복할 것이라는 예측이 가능하다.

실제로 상당수 전문가들은 내년 1분기에는 경기가 회복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성태 한국은행 총재는 9일 금융통화위원회의 기준 금리(연 2%) 동결 직후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경제활동이 그동안의 하강세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였지만 활발하지는 않다"며 "세계 경제를 비롯한 우리 경제가 내년쯤 들어가면 상황이 좋아질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집값은 어떤가. 버블세븐 지역의 집값 상승의 진원지인 서울 재건축 아파트값을 보면 주가보다 상승속도가 더욱 가파르다. 올 들어 잠실주공5단지 112㎡형의 상승률은 국내 증시의 '대장주'인 삼성전자의 상승률(44%)과 비슷하다. 경기도 과천시 주공4단지 74.6㎡(23평)형은 올해 상승률이 57.1%에 달해 삼성전자 주가보다 더 올랐다. 이 아파트는 연초만해도 3억5000만원을 밑돌았지만 현재 5억5000만원 이상에 호가된다. 6개월 새 2억원이나 올랐다.

4월 들어서는 강남을 비롯한 버블세븐뿐만 아니라 전국 아파트 매매가격도 상승세로 돌아섰다. 오름세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강남 재건축 아파트에서 시작된 집값 상승세가 도미노처럼 확산되는 조짐이다. 올 들어 강남 재건축 아파트값이 경기 선행지표인 주식과 함께 동반 상승한 셈이다. 물론 아직도 찬바람이 불고 있는 지방까지 합치면 전국 집값 상승률은 크지 않은 편이다. 경기에 선행하는 아파트가 강남 재건축 등 수도권 일부 지역에 국한된다는 말이다.

경기지수와 아파트값

올 상반기 들어 실물지표가 조금씩 개선되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경기 하강세가 멈추고 있다. 최악의 경제 위기 상황은 지나갔다는 전문가들의 진단이 잇따르고 있다. 하락세를 이어가던 경기 동행지수와 선행지수도 올 들어 전달 대비 기준으로 동반 상승하고 있다. 지난 4분기 대외적 요인에 따른 경기 하강세가 금융시장 안정 등으로 제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으로 해석된다.

강남 재건축 아파트를 제외한 전체 아파트 가격 변동은 매매가나 전셋값이 모두 경기지수보다 아직 조금 후행하고 있다. 하지만 강남 재건축 아파트만 놓고 볼 때는 경기 선행성이 나타난다. 부동산정보업체인 부동산뱅크가 1998년 외환위기 이후 현재까지 강남3구 재건축 아파트값 매매 변동률(3.3㎡,전달 대비 기준)과 경기동행 및 선행지수 변동률(전달 대비)을 비교한 결과 약간의 작은 파동을 제외하면 최근 들어 대체로 비슷한 움직임을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 전체 아파트값도 올 들어 경기선행지수와 전체적으로 엇비슷한 곡선을 그렸다.

앞으로의 경기동향을 예측하는 지표인 경기선행지수는 구인구직률,소비자 기대지수,기계수주액,종합주가지수 등 10개 지표들의 움직임을 종합해 작성한다.

현재의 경기상태를 나타내는 동행지수는 비농가 취업자수,광공업 생산지수,제조업 가동률 지수,서비스업 생산지수,도소매 판매액 지수 등 8개 지표를 분석해 산출한다.

과거와 다른 움직임

과거 부동산 대세 상승기에는 집값이 실물경기 회복에 후행했다. 경기가 살아나고 소득이 늘면서 주택 수요가 살아났다는 얘기다. 사상 유례없는 외환위기 이후 바닥을 쳤던 부동산 시장은 2002년부터 2006년까지 장기간 불이 붙었다. 정부 규제 완화와 저금리로 인한 풍부한 유동성,주택 공급 부족 등이 영향을 미쳤다.

외환위기 당시 정부는 △분양가 자율화(1998년) △분양권 전매 허용 및 재당첨 제한 폐지(1999년) △신규취득주택 거래세 감면(2001년) 등 파격적인 규제완화책을 잇달아 쏟아냈다. 1999년부터 경기 회복이 지표상으로 가시화되고 2001년 하반기부터 강남 재건축 아파트를 중심으로 집값이 뛰기 시작했다. 2002년에는 대세 상승 초입에 진입했고 2006년까지 오름세가 이어졌다. 지역별 편차는 있지만 대체적으로 보면 경기가 회복된 뒤 2~3년 뒤부터 집값이 본격적으로 탄력을 받는 모습을 보인 셈이다.

박원갑 스피드뱅크 연구소장(부사장)은 "부동산경기는 실물경기에 6개월가량 후행한다는 게 통설"이라며 "최근 서울 강남을 비롯한 일부 지역 집값이 실물경기가 회복되지 않았는 데도 전 고점을 뚫은 것은 과거의 학습효과와 아파트의 투자 상품화 등으로 인해 주택시장의 프레임이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이건호 기자 leek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