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여록] 10년 만에 다시 꺼내든 칼
정부가 금융권을 통해 계열사나 자산 매각을 압박하고 있는 점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자발적인 자구노력을 하지 않으면 기업이 통째로 거덜날 수 있다는 '협박성 메시지'가 나오고 있다는 점도 유사하다. 또 일부 어려운 기업들이 구조조정을 거부한 채 버티기에 들어갔다는 소문도 어디서 많이 듣던 스토리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한 대기업 재무담당 임원은 "립서비스 냄새가 날 때도 있지만,정부가 스스로 시장친화형 구조조정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 가장 이채롭다"고 말했다. 사실 살벌한 구조조정 시장에 '시장친화적'이란 표현이 등장한 것은 이례적이다. 이 말의 뜻은 외환위기 직후 진행된 구조조정 양상을 떠올려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당시 키워드는 '빅딜,워크아웃,외자유치' 등이었다. 여기에 하나 더하면 '재계의 저승사자'로 불렸던 '이헌재' 정도일까. 국가부도 사태에 직면했기에 제대로 된 시장이 있을 리 만무했다. 동원할 수 있는 정책은 대부분 비상한 것들이었다. 특히 빅딜과 워크아웃에는 누가 봐도 시장논리 외에 다른(?) 논리가 작용했던 것이 분명하다. 이 틈에 구조조정 시장의 유일한 수요자였던 외국계 자본은 외자유치 지상주의의 바람을 타고 과실을 독점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나,이제 시장친화형 구조조정이 강조되고 있는 상황을 보면서 그만큼 우리 경제가 한 단계 성숙했다는 느낌을 받는다. 한 회계법인 대표는 "정부가 인위적으로 기업을 윽박지르고 해체하는 형태에서 벗어나 채권단과 기업들이 공조체제를 구축하고 있는 점,해당 기업들이 정부보다는 시장을 설득하는 데 역량을 집중하고 있는 점 등은 긍정적인 변화로 볼 수 있다"고 평했다.
하지만 시장친화적 구조조정이라고 약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시장도 판단을 잘못하거나 실수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한 대기업 임원은 "시장은 항상 눈에 보이는 것을 절대시하는 측면이 있다. 조금만 더 투자하면 성장할 수 있는 사업에도 부정적인 눈길을 주기 일쑤"라고 말했다. 우리 경제의 성장동력을 갉아먹지 않는 방향으로 구조조정이 돼야 한다는 얘기다. 기업과 시장의 소통이 지금보다 훨씬 원활하게 이뤄져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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