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 내정자(63)는 굴곡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한국의 대표적인 경제관료다. 1980년대와 90년대 경제 성장과 금융산업 발전에 큰 공을 세웠으나 외환위기를 초래한 주범으로 몰려 고초를 겪어야 했다. 좌파 색채가 강한 노무현 정부에서 금융감독위원장을 맡았고 우파인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 2기 경제팀을 이끄는 수장의 책무를 지게 됐다. 현실 감각이 뛰어나고 긍정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 그가 글로벌 경제위기 속에서 어떤 정책을 펼쳐나갈지 주목된다.

대기업 주도 경제발전 옹호

그는 한국 대기업 그룹의 역할을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대기업이 '재벌'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로 그려지고 외환위기를 초래한 주범이라는 비판을 받는 것에 대해 "경제 규모가 작고 개방된 한국과 같은 나라에서는 대기업 그룹의 선단식 경영이 적합하다"며 적극적으로 옹호한다. 미국의 GE 같은 기업들도 사실은 그룹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노무현 정부 때 금감위원장으로 복귀했지만 당시의 개혁 일변도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목소리를 냈다. 그가 있었기에 집단소송제 시행을 앞두고 분식회계 기업에 대한 대사면을 할 수 있었다.

돈 있는 사람이 국내에서 돈을 쓸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줘야 한다는 소신도 확고하다. 요즘처럼 수출이 급격히 줄어드는 상황일수록 내수소비 진작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공무원 골프 금지령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생각이다.

금융과 산업을 분리해야 한다는 입장에 대해서도 "이제는 완화할 때가 됐다"고 말한다. 국내 기업들이 성숙해졌고 은행들도 대주주 지시라고 해서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는 문화가 정착되고 있다. 여기에다 외국계 자본에 상대할 수 있는 주체가 국내에서는 산업자본 말고는 없다는 현실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관료로서의 자부심 대단

그는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의 장하준 교수(경제학)가 쓴 책들을 거의 다 읽었다. 장 교수에 대해 "세계 경제학계의 비주류 쪽에 속하지만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경제학자로 논리가 치밀하고 한국의 그룹형 기업에 대한 이해가 깊다"고 평가했다. 장 교수가 서울대로 옮기려고 했다가 교수 찬반투표 과정에서 떨어진 것에 대해서도 상당히 아쉬워한다. 그를 뽑지 않은 서울대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는 얘기까지 한 것으로 전해졌다.

윤 내정자가 장 교수의 논리에 매력을 느끼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정부와 공무원의 역할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는 점이다. 장 교수는 정부의 개입을 없애라는 신자유주의는 미국이나 영국에서조차 실제로 실행됐던 적이 없고,정부의 강력한 개입을 토대로 해서 이들 국가도 경제개발을 했다고 주장한다. 윤 내정자 역시 경제를 발전시키는 데 정부와 공무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고 꼭 필요하다고 보는 입장이다.

관료로서의 자부심이 대단한 그는 배포있는 공무원이기도 하다. 기자들과 만나서도 거리낌없이 소신을 편다. 재무부 국장 시절에는 장관과도 많이 싸웠다. 공기업 주식매각 과정에서 모 시중은행에 중개 업무는 물론 딜링 업무까지 함께 허용하는 결정을 내리자 장관실을 찾아가 "이러면 안 된다"고 싸웠고,말리는 비서실장에겐 "장관 잘 모시라"고 큰 소리를 치기도 했다.

외환위기는 그에게 엄청난 시련을 안겨줬다. 법정 공방까지 거치면서 외환위기에 대한 책임이 없는 것으로 결말이 났지만 그는 유배지로 떠나듯 필리핀 아시아개발은행(ADB) 이사로 갔다. 당시의 심정을 그는 "비감했다"고 소회했다.

ADB 총회가 열렸던 2004년 5월 필리핀 마닐라에서 만난 윤 내정자는 바나나 섬유와 파인애플 섬유를 엮은 망사로 만든 필리핀 전통의상 '바롱 타갈로그'을 입고 있었다. 얼굴은 지금보다 훨씬 그을려 원주민이 다 됐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는 "무더운 이곳 날씨에는 이곳 의상이 맞더라"며 "자주 입는다"고 말했다.

필리핀에서 5년간 지내면서 골프를 많이 쳤지만 실력은 평범한 수준이다. 그 자신은 "다들 나하고 붙으면 자신있다고 말한다"며 "골프에 소질이 없는 것 같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같이 쳐본 사람은 벙커샷이 약하다고 말한다. 필리핀 근무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뒤에는 "사계절이 있는 나라에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알아야 한다"며 행복론을 펴기도 했다.

부인은 가톨릭 신자이지만 윤 내정자는 특별히 믿는 종교가 없다. 굳이 말하라면 '불교'라고 말한다. 교리와 행실이 일치되는 종교로는 이슬람을 꼽는다.

금융위에 힘 실어줄 듯

기획재정부 장관 내정 발표가 난 뒤 소감을 묻는 지인에게 그는 "개처럼 끌려갔다가 피 터지면서 나오는 것 아닌지 걱정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지금 과분하고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도 했다고 한다.

기획재정부에서 국장급 이상 간부들 가운데 그가 잘 아는 후배는 3분의 1 정도다. 잘 아는 공무원들이 많은 금융정책실이 금융위로 떨어져 나갔고 예산처가 새로 합쳐진 탓이다.

신임 허경욱 기획재정부 1차관과는 업무 이외에 특별한 관계가 있다. 두 사람의 딸은 미국 하버드대학 로스쿨에 다니고 있는 선후배 사이다. 신제윤 국제업무정책관(2차관보)의 딸 역시 하버드 대학에 재학 중이다. 한 학교의 학부모들이 장관과 차관,차관보를 맡고 있는 셈이다.

함께 경제팀을 이끌어갈 진동수 신임 금융위원장에 대해 윤 내정자는 상당히 높게 평가한다. "참 능력 있는 사람이고,아는 것도 많고,차관을 그만둔 뒤 나와 이야기도 많이 한 사람"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두 사람은 지난해 초 대통령직인수위 시절 경제1분과 자문위원으로 함께 활동했다.

윤 내정자가 금감위원장으로 일할 때에는 금융감독원장을 겸임했다. 그때의 경험을 토대로 한 그의 판단은 '지금의 금융감독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금융위가 중심이 돼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줘야 하는데,시장을 잘 아는 금감원이 분리돼 있는 데다 금융위원장과 금감원장의 미묘한 파워 게임까지 겹치면서 금융시장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충실히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윤 내정자는 취임 직후부터 교통정리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금융위원장에게 더 많은 힘을 실어주는 쪽을 선택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청와대 경제수석에 윤진식 한국투자금융지주회장이 임명된 것에 대해서는 "가용 자원을 총동원한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경제위기를 맞아 가동할 수 있는 소방수들을 모조리 끌어왔다는 얘기다. 불을 끄는 데 실패한다면 그 충격은 더 클 수밖에 없다. 윤 내정자가 염려하는 사태도 바로 이것이다.

주인 있는 민영화 지지

윤 내정자는 공기업 민영화에 대해 기본적으로 지지한다. 하지만 대주주 지분을 넘겨주지 않는,그래서 주인이 없는 회사를 만드는 민영화에 대해서는 "폐해가 발생할 수 있다"며 조심스러운 입장이다. 포스코 KT 국민은행 등이 과거에는 정부가 대주주 지분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주인이 없는 민영화 기업들이다. 주주의 견제를 받지 않기 때문에 경영진이 전권을 휘두르는 폐해가 생길 수 있고 정치권 등 외부의 부당한 간섭을 받는 조직으로 전락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최근의 국세청장들 가운데는 이용섭 민주당 의원을 가장 높게 평가했다. 외부에서 국세청에 들어가 법과 원칙을 지키고 개혁을 많이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 청장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것에 대해 윤 내정자는 매우 아쉽게 생각하고 있다. 그는 최근 사석에서 "국세청은 청와대 직할이라서 그런지 기획재정부를 우습게 아는 경향이 있다"며 "돈을 만지는 힘 있는 조직은 기관장을 한번은 내부에서,한번은 외부에서 임명하는 식으로 '홈앤어웨이'를 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윤 내정자가 직면한 첫 과제는 국회 인사청문회를 넘어서는 일이다. 국회에 인사청문회를 빨리 해 달라고 요청하려면 적어도 이번 주말까지 자료를 제출해야 하는데,홀로 사는 노모에게까지 가서 예금이 얼마냐고 물어봐야 하는 것에 대해 부담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승윤 기자 hyuns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