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작가실인 해산토굴 뒷산에 박새와 뻐꾹새,꿩과 부엉이가 산다. 박새는 대밭과 감나무 사이를 오가며 '비이비이' 울어서 내 작은 실존을 일깨워 준다. 뻐꾹새는 '뻐꾹뻐꾹'하고 울어서 고향마을에서의 싱싱한 젊은 날을 그리워하게 한다. 꿩은 까투리를 거느리고 다니면서 죽로차밭 바닥을 뒤지다가 꿩꿩 포드득 하고 날아가곤 함으로써,가족사랑을 생각하게 한다. 부엉이는 밤이면 '부엉 부엉'하고 울어서 막막하게 잠들어 있는 내 영혼을 문득 깨어나게 하곤 한다. 그 부엉이는 내 사전에 '황혼이 되면 날기 시작하는 미네르바의 부엉이'로 기록되어 있다. 미네르바는 여신이다. 그 여신의 탄생은 끔찍스럽다. 그 여신은 제우스의 머리에 잉태되어 있었다. 제우스가 미네르바를 잉태한 아내를 삼켜버렸기 때문이다. 제우스는 미네르바가 성숙하자 극심한 두통(산통)을 주체할 수 없었다. 대장간의 신 헤파이투스가 도끼로 제우스의 머리를 절개해 미네르바를 태어나게 했다.

미네르바는 자기의 탄생이 그러하므로 멍청하여 트이지 않은 세상의 모든 머리를 도끼로 깨고 그 속에 지혜를 불어넣어주는 여신이 된 것이다. 그 여신은 항상 부엉이 한 마리를 옆구리에 끼고 다니면서 부엉이에게서 지혜를 얻곤 한다.

내 뒷산에 사는 부엉이는 늘 나의 반대편에 서 있곤 한다. 그 부엉이는 옹졸한 나의 시각을 꾸짖는다. 가령 내가 나와 자식들하고만 잘먹고 잘살려는 이기적인 생각을 할 때,나의 명예만 생각할 때 내 막막한 미망(迷妄)을 꾸짖는다. 한치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근시안적인 판단을 할 때 내 눈앞의 칙칙한 안개를 꾸짖는다. 그가 꾸짖을 때마다 나는 그렇다 하고 수긍하면서 내가 보지 못한 부분을 바라보려고 그 부엉이처럼 눈을 부릅뜬다.

미국 새 대통령 오바마도 어쩌면 그러한 부엉이 한 마리를 옆에 끼고 살아오지 않았을까. 오바마는 역지사지(易地思之)를 잘하는 사람이라고 들었다. 그의 의견에 반대하는 자가 있을 때 첨예하게 대립하려 하지 않고,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의 처지가 되어 심사숙고한 다음 "네 말도 옳다"하며 동조하고 나서 "그러나 그것보다는 내 주장이 현실적으로나 이상적으로나 한 발 앞서는 것 아닌가"하고 설득함으로써 마침내 그 반대자로 하여금 그의 편이 되게 하는 삶의 지혜를 가졌다.

그러한 삶의 방법이 기적을 가져왔다. 나는 생각한다. 그 기적을 가져온 것은 오바마가 아니고 그가 옆구리에 늘 끼고 다니는 미네르바의 부엉이인 것이다.

혹한이 닥치면서부터 뒷산 부엉이는 울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 부엉이가 나의 뒷산을 버리고 어디론가 이사를 간 것은 아니다. 현실적으로 울지 않고 있을 뿐,그는 늘 내 내면에 와서 운다. 올해 늦가을이면 자기의 삶이 건재하고 있음을 '부엉부엉'하고 보여줄 것이다.

내가 소설을 쓸 때,시 한 편을 쓰고 났을 때,칼럼 한 편을 쓸 때면 내 뒷산의 부엉이가 참견을 한다. 그는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황혼이 되면 날듯이 글을 다 마무리 지어 발송할 무렵에 눈을 부릅뜨고 참견을 한다. 그 참견으로 인해 나는 칼럼을 다시 냉철한 마음으로 고쳐 쓰곤 한다.

부엉이를 옆에 끼고 다녔다는 미네르바는 오만한 자의 고정관념을 깨는 지혜의 여신이다. 고정관념이란 얼마나 무서운 우리들의 칙칙한 어둠이고 장벽인가. 나의 사랑하는 그 부엉이를 이명박 정부의 지붕 위로 날려 보내주고 싶다.

우리 사회,우리 역사,우리 시대를 이끌어나가는 주체가 되는 자들은 모름지기 그런 미네르바의 부엉이 한 마리쯤 옆구리에 끼고 있어야 한다. 돌아가지 않는,꽉 막혀 있는 머리를 깨고 거기에 지혜를 넣어주는 눈 부릅뜬 미네르바 여신의 부엉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