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금융위기와 경기침체에 대한 한국은행의 대응 방식을 놓고 논란이 일고 있다.

정부와 정치권, 시장 일각에서는 한은이 위기에 민감하지 않으며 신속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을 쏟아내고 있다.

이는 정부와 한은이 9월 리먼 브러더스 사태 이후 133조 원에 달하는 원화와 외화 유동성 공급 계획을 밝혔음에도 시중에 돈이 제대로 돌지 않는 현상이 계속되고 있는데 따른 것이다.

한은은 이런 지적에 대해 계획했던 내용의 상당부분을 이미 집행한데다 모든 기관들이 원하는 요구를 발권력으로 지원하는 것은 국가경제를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고 반박했다.

특히 한은이 마구잡이로 돈을 풀 경우 인플레이션이라는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 한은 "계획대비 66% 원화 공급"

정부와 한은이 9월 리먼 브러더스 사태 이후 공급하겠다고 밝힌 유동성 규모는 약 133조 원에 이른다.

이 가운데 한은이 밝힌 유동성 공급 규모는 약 40조1천억원이며 이중 66%인 26조3천억 원이 실제로 집행됐다.

원화 유동성 공급 규모는 ▲환매조건부채권(RP) 재매각 및 매입 9조5천억 원 ▲통안증권 중도 환매 7천억원 ▲총액한도대출 증액 2조5천억 원 ▲국고채 단순매입 1조원 등 총 13조7천억 원이다.

이 중 총액한도대출만 당초 계획(2조5천억 원)보다 적은 1조6천억 원이 집행됐다.

이는 은행별 키코 피해 기업 지원 실적과 연계돼 있기 때문이라고 한은은 설명했다.

외화유동성 공급 계획 규모는 200억 달러(약 26조4천억원)로, 이 중 경쟁입찰식 스와프 거래를 통해 102억 달러가 공급됐으나 수출환어음 담보대출로 배정했던 100억 달러는 아직 1달러도 집행되지 못했다.

한은 관계자는 "수출환어음 담보대출은 수요가 없는데 따른 것이지 공급을 안하는 것이 아니다"고 설명했다.

한은은 이와 함께 지난 10월 이후 지금까지 3차례에 걸쳐 기준금리를 1.25% 포인트 인하했다.

특히 지난 10월27일에는 기준금리를 파격적인 수준인 0.75%포인트 내렸다.

정부는 국책은행 중기자금 공급 3조3천억원 확대, 신.기보에 5천억원 추가 출연, 은행 대외채무 140억 달러 보증, 외평기금 통한 외화스와프 시장 100억 달러 공급 등 약 93조원의 공급 계획을 밝혔으며 이 가운데 일부를 집행했다.

◇ "중앙은행, 더 과감해야"

외부에서는 발권력과 외환보유액을 가진 한은에 보다 과감한 역할을 주문하고 있다.

정부는 물론 금융기관, 기업까지 한은에 손을 벌리고 있는 상황에서 한은이 외부의 다급한 목소리에 대한 응답이 미흡했다는 지적이다.

증권사.자산운용사에 대한 자금공급, 채권안정펀드 지원, 은행채 매입 등 한은이 취한 조치들도 정부를 비롯한 외부의 요구를 뒤늦게 수용했다는 평가다.

이런 요구가 나오기 전에 보다 과감한 대응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이헌재 전 기획재정부장관은 최근 서울대 강연에서 "한은과 정부 간 정책공조 체제와 채널을 구축해야 한다"며 "세계에서 가장 독립적인 중앙은행으로 꼽히는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영국 영란은행도 위기시에는 정부와 정책공조를 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은이 정부와 손잡고 적극 대응하는 모습이 필요하다는 것이 이 전 장관의 지적이다.

한 경제연구소의 연구위원은 "한은이 소극적이라는 비판이 옳은지 여부를 떠나 최소한 적극적이지 않았던 것은 분명한 것 같다"며 "채권안정펀드 등 유동성 지원에 한은이 더 과감해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현욱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은 "우리나라 금융시장이 미국 등 선진국의 상황보다는 건전한 상황이기에 상대적으로 적극적이지는 않았던 측면이 있다"며 "현재는 한은이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그는 다만 "유동성이 늘면 원화 가치가 떨어지면서 가뜩이나 급등하고 있는 환율에 더 부담이 될 수 있다"며 "한은이 단순히 물가만 신경 썼다기 보다는 중앙은행으로서 여러 측면을 고려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 한은 "무작정 풀 수는 없다"

한은은 외부의 이런 시각에 대해 인정하기 어렵다는 반응이다.

한은은 ▲그동안 지원키로 했던 내용의 상당 부분을 집행했는데다 ▲검토중인 상황에서 집행 요구가 공개적으로 발표되면서 늑장 대응하는 것처럼 오해되고 있으며 ▲기준금리를 한꺼번에 급하게 내리는 것은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고 반박했다.

한은 관계자는 "한은은 돈의 흐름이 막힌 곳에 대해서는 유동성 지원으로 즉각 뚫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다만 적절한 공급시기를 결정하려고 관련 내용을 검토하고 있는 단계에서 다른 당국이 사전 상의도 없이 공개적으로 자금 투입을 요청하면서 마치 한은이 늑장 대응하는 것처럼 잘못 알려지는 경우가 있다"고 말했다.

한은은 또 기준금리 인하에 대해서도 소극적이라는 일부 지적에 대해서도 통화정책 방식을 잘 모르는데 따른 오해라고 지적했다.

금리를 지나치게 큰 폭으로 내리면 거품을 형성하는 등 부작용이 생길 수 있는데다 앞으로 경제침체가 장기화될 가능성이 큰 상황에서 나중에 사용할 `카드'를 모두 소진하는 것은 전략적으로 현명하지 않다는 의견이다.

한은 내부에서는 정부 재정으로 해결해야 할 일을 중앙은행에 떠맡기려는 경향이 있는 점도 문제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한은은 기본적으로 관련법상 1년 이상의 장기 유동성을 공급하기 어려운 만큼 위기의 근본해결을 위한 자금투입은 재정이 맡아야 하는데, 나중에 발생할 국가채무와 책임문제 때문에 모두가 한은에 손을 벌리고 있다는 것이다.

배상근 한국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모든 기관들이 한은에 돈을 요구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면서 "이는 경제분야 곳곳에 모럴해저드를 초래한다는 점에서 바람직하지는 않다"고 지적했다.

(서울=연합뉴스) fusionjc@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