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중국 제나라에 도우토(屠牛吐)라는 소잡는 이가 있었다. 기술이 탁월해 하루에 소 아홉 마리를 잡아도 칼이 전혀 무뎌지지 않아 소털까지 자를 수 있었다. 그런데 포정( 丁)이라는 사람은 이보다도 몇수 위였다. 한번 간 칼 한자루로 19년 동안 소를 잡았다.

솜씨 좋은 소잡이는 1년 만에 칼을 바꾸고 평범한 소잡이는 달마다 칼을 바꾸었지만 포정의 칼은 늘 숫돌에서 막 간 것과 같았다. 육질의 방향에 맞춰 칼이 움직였고 날이 뼈와 부딪치는 일은 아예 없었다. 뼈마디 사이에는 작지만 틈이 있게 마련인데,두께 없는 날을 그 사이로 넣으니 도의 경지에 달했다.

여기서 포정해우( 丁解牛)란 말이 나왔다. 포정이 소를 잡는다는 의미다. 어느 분야에서 달인의 경지에 이르고 신기를 보일 때 쓰인다. 뛰어난 예술가와 장인에게 많이 한 말인데,탁월한 기량을 보이는 최상위급 스포츠 선수에게 써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다.

골프에서도 마찬가지다. 가만히 놓인 공을 좋은 재질로 잘 만들어진 클럽을 휘둘러 날리는 단순한 동작이건만 어렵긴 얼마나 어려운가. 이걸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월등한 프로선수들이야말로 현대판 포정이 아니겠는가. 최근 미국 LPGA투어 시즌 최종대회인 ADT챔피언십에서 우승해 100만달러의 상금을 거머쥔 신지애 선수도 '골프 포정'의 대열에 들어설 수 있을 것 같다.

신 선수는 대회 마지막날 6번홀에서 공이 물에 빠져 보기를 했다. 그러나 "아직 홀은 12개 남았다"고 마음 잡으며 승리했다고 한다. 빼어난 기량을 넘어 마음조절이 됐다는 얘기다.

경제위기의 가운데로 들어서면서 잔뜩 위축되는 요즘이다. 계절까지 겨울의 초입,찬바람에 몸까지 움츠러드는데 신 선수의 우승은 한줄기 작은 빛을 던졌다. 10년 전 외환위기로 모두가 힘들 때 박세리 선수가 98US여자오픈 대회에서 선전했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맨발로 물속에 들어가 쳐낸 투혼의 샷에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박수를 쳤던가. 박 선수처럼,신 선수처럼 더 많은 한국의 포정들이 나와 이 어려운 때 우리 모두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주면 좋겠다.

허원순 논설위원 huh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