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그룹이 계열사 독립경영 등으로 경영쇄신을 시작한 지 8일로 100일을 맞는다.

수십년 동안 유지됐던 오너 중심 경영체제가 막을 내렸음에도 외견상 삼성은 큰 무리나 변화없이 '순항'하는 모습이다.

이는 이건희 전 회장이 삼성의 구심점이긴 했지만 전문경영인들에 의한 경영이 오래전부터 자리잡았고, 이 전 회장의 퇴진 이후에도 관성적으로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삼성이 '순항'하고 있다는 것은 국내 경제위기설, 국제 금융위기 등 대내외 경제상황 급변에도 불구하고 전자, 석유화학 등 일부 계열사의 실적 부진 외에는 큰 경영 실책이나 혼란이 없다는 데서 내려진 평가다.

이런 실적 부진도 경영 시스템의 문제라기보다 해당 업종의 경기순환주기에 따른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그러나 이는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일뿐 내부를 들여다보면 이 전 회장의 퇴진과 전략기획실의 해체에 따라 삼성이 잃어버린 '기회 비용' 역시 만만치 않다는 게 재계의 관측이다.

이 전 회장 퇴진 이후, 더 멀리로는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로 촉발된 '삼성 사태'가 시작된 이후 삼성은 기존 사업의 확대 외에 활발한 전략적 경영 및 투자의 행보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국제금융위기 사태를 맞아서도, 예전 같았으면 나타났을 법한 계열사들의 일사분란한 대응 양상은 보이지 않고 있다.

'삼성사태'가 시작된 이후 나타난 삼성의 전략적 경영 체제 마비 현상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고 이 때문에 삼성은 그룹 체제이면서도 그룹이 가질 수 있는 시너지 효과를 제대로 내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낳고 있기도 하다.

◇ '삼성 재판' 종결까지는 '과도기' = 삼성은 계열사 독립경영를 골자로 하는 경영쇄신을 시작한 지 3개월 이상됐으나 경영쇄신을 위한 적극적인 행보는 보이지 않고 있다.

삼성은 약속했던 10가지 경영쇄신안 중 ▲이건희 전 회장 퇴진 ▲이재용 삼성전자 전무의 최고고객책임자(CCO) 사임 ▲전략기획실 해체 ▲이학수 전 전략기획실장 퇴진 등이 실행됐다는 점을 경영쇄신의 성과로 꼽는다.

그러나 경영쇄신의 실질적인 내용이 돼야 할 계열사 독립경영을 발전시킬 수 있는 후속 조치는 계속되지 않고 있다.

한국 재계를 선도하는 삼성의 비중을 감안할 때 재계의 체제를 바꿀 수도 있는 계열사 독립경영을 출범시켜 놓고도, 이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지는 않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재계는 '원죄'처럼 삼성을 괴롭히고 있는 경영권 편법 승계, 조세포탈 등에 관한 '삼성 재판'이 종결되지 않는 한 삼성이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지 못할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이 전 회장, 이학수 전 전략기획실장 등 삼성의 전현직 수뇌부가 실형을 선고받을 수 있는 재판이 진행되고 있는 한, 이 시기는 삼성에는 언제나 '과도기'일 뿐이라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으로 인해 삼성의 적극적인 행보는 어떤 종류이든 자칫 여론의 역풍을 일으킬 수도 있는 만큼 민감한 시기에 최대한 자제할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이 때문에 삼성의 조용한 행보는 8일 항소심이 열리는 '삼성 재판'이 대법원에서 종결되는 올연말까지 계속될 것이라는 관측이 유력하다.

◇ 내년 경영계획 착수, 인사 준비로 '정중동' = 과도기임에도 불구하고 내년도 경영계획 수립, 연말연초 인사 준비 등 일상적인 경영 일정은 예년과 비슷하게 진행되고 있다.

그룹 컨트롤타워였던 전략기획실의 총괄, 조정 기능이 사라진 가운데서도 삼성은 이달초 경영계획 수립에 착수했다.

한국 경제를 불안하게 했던 '9월 위기설', 뒤이어 터진 국제금융위기로 인해 대내외 경영환경이 불안정해진 탓에 계획 수립에 애를 먹고 있긴 하지만 계열사별로 내년도 경영계획 수립에 착수했으며 이는 이달말에 확정될 예정이다.

'삼성 서초동 시대'를 열게 될 삼성전자의 '서초 타운' 이사도 다음달 중순부터 하순까지 진행될 계획이다.

'찬바람이 불면 재계 인사철이 시작된다'는 통설처럼 삼성에서도 연말연초 인사에 대한 관심이 조금씩 고개를 들고 있다.

'뚜껑을 열기 전엔 절대 알수 없다'는 철통보안으로 이름이 높은 삼성 사장단 인사는 올해의 경우 그룹 전현직 수뇌부의 재판이 걸려있는 만큼 더욱 예측을 불허하고 있으나 인사를 위한 준비작업은 진행되고 있다는 시각이 많다.

'실적이 있는 곳에 보상이 있다'는 실적주의 인사 원칙에 따라 실적을 토대로 인사 평가가 진행되며 10월말까지의 연간 실적이 기본 평가 대상이 되는 것이 보통이다.

계열사들은 목표 실적의 이행을 점검하거나 독려하고, 실적이 부진한 계열사 경영진들은 조바심을 낼 수밖에 없는 시기다.

삼성은 수년간 대폭의 사장단 인사가 없었던데다 올해 초에는 '삼성사태'로 인사폭이 작았기 때문에 이번에는 대폭의 인사가 단행되지 않겠느냐는 것이 일반적인 관측이다.

'IMF 경제위기' 이후 가장 심각하다는 경제 위기 상황으로 인한 기업들의 전반적인 실적 악화도 인사폭을 크게 하는 요인이 될 수 있으나, '삼성 재판' 결과가 향후 인사의 최대 요인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서울연합뉴스) 현경숙 기자 ksh@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