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연 <서울대 교수·경제학>

십수년 만에 가족을 데리고 귀국한 A교수에게 한국은 그들만의 나라였다.

외국 명문대의 테뉴어도 내려놓고 외국에서 대부분의 세월을 보낸 자식을 한국인으로 키워보고자,그리고 고국의 후학들을 양성해보고자 돌아왔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은행대출을 받아 전세금은 겨우 마련했지만 문제는 학교였다.

고등학생이 된 아이인지라 하는 수 없이 외국인학교에 입학시켰지만 이 학교를 졸업한다 하더라도 한국 대학으로는 진학할 수 없다고 했다.

들리는 이야기로는 외국인 학교에 아이를 보내는 '귀족'들에게 한국 대학에 입학하는 자격을 주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힘센 단체와 사람들 때문이라고 한다.

집도 없는 사람이 귀족이라니 어이가 없다며 이야기를 꺼낸 후,A교수는 이렇게 덧붙였다.

"내가 남이가(내가 남이냐)."

한 나라의 국력은 더 많은 국민들을 '우리'로 만드는 데서 나온다.

선진국은 외국인도 '우리'로 만드는 힘이 있는 나라다.

그러나 A교수는 한국인인데도 자신의 모국에서 '그들'이 되었다.

이것이 우리의 실상이고 한국의 현주소다.

특히 전 정권은 이 점에서 처절히 실패했다.

함께 '우리'가 돼야 할 국민을 보수와 진보로 나누고 부자와 그렇지 못한 자로 구분하고 우리 편과 그들 편으로 쪼갰다.

'그들'이 된 다수의 국민들의 좌절감,상실감,피해의식만 키웠다.

국력을 키운 것이 아니라 소모한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일자리 창출을 기치로 내걸고 출발했다.

경제가 성장하니 일반 국민뿐만 아니라 특히 실업을 겪고 있거나 실업의 위험에 상대적으로 더 많이 노출돼있는 서민층에게 보다 매력적인 메시지다.

그런데 이명박 대통령의 지지율은 취임 직후 70% 중반대에서 최근에는 20%대로 급락했다.

왜인가? 그동안 대통령과 핵심인사들의 말과 면면,그리고 정책들이 많은 사람들을 '우리'로 만들기보다 '그들'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오렌지를 제대로 발음하지 못한다고 스트레스를 주더니만 라면값을 어설프게 잡겠다고 난리쳤다가 쇠고기로 광풍을 맞았다.

고위 공직자 인선 명단을 보면서 많은 국민들은 이 정부도 '그들만의 정권'이란 기미를 느꼈다.

'먹고 싶지 않으면 안 사 먹으면 되지'라는 말은 국민들에게 '우리는 너희를 버렸다'라는 말로 들렸다.

이명박 대통령은 더 많은 국민들을 '우리'로 만들어야 한다.

그의 성장과 성공의 배경은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기도 하다.

그 기대를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먼저 이명박 정부가 지향하는 시장경제는 따뜻하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정부 내의 어느 수석은 이명박 정부가 지향하는 체제는 '따뜻한 시장경제'라고 했다.

정부는 이 따뜻함의 내용을 구체적이고도 정교하게 채워 국민들에게 내놓아야 한다.

그런데 최근에는 법인세와 소득세를 경감한다고 한다.

법인세 인하는 성장에 도움이 되니 바람직한 정책이다.

그러나 여러 공제 등으로 실효세율이 낮은 소득세율을 낮춘다면 아마 부자,그들만의 정권이라는 이미지는 더욱 굳어질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실용을 버려야 산다.

오렌지,라면,쇠고기 수준과는 다른 차원의 담론으로 국민들을 공감시켜야 한다.

즉 실용이 아니라 가치를 붙들어 국민들의 가슴을 뛰게 만들어야 한다.

따뜻한 시장경제와 시민적 자율,그리고 사회적 자본에 입각한 민주주의의 비전을 보게 해야 한다.

그래야 '오륀지'라고 발음하지 못하고 라면값이 오르고 미국산 쇠고기를 먹으면서도 이 정부가 내세우는 비전과 가치에 공감하기 때문에 "MB,우리는 당신을 믿어요"라고 말하는 국민들이 여기저기서 나올 것이다.

많은 것을 버리고 귀국한 A교수를 위해서,그리고 그보다도 훨씬 어려운 많은 이웃들을 위해서라도 한국이 여기서 주저앉을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