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에 너무 늦은 나이가 어디 있습니까."

한국외국어대 서반아어학과 졸업,대학 시절 영국 대사관과 미국문화원 영어모임 회장으로 활동,외교통상부(옛 외무부)에 입사해 부 내에서 영어교육 성적 최우수자로 선발돼 영국 유학,사우디아라비아 대사관 근무,주 워싱턴 대사ㆍ주 우루과이 대사 역임….

영어라면 누구보다도 유창하게 구사할 것 같은 경력이다.

이런 경력을 가지고 다시 영어 공부하러 대학원에 들어간 사람이 있다.

김재범 외교안보연구원 명예교수(58)가 그 주인공.김 교수는 전두환 정권 시절 영부인의 통역을 맡았을 정도로 영어를 잘한다.

하지만 그는 지난해 8월부터 서울 목동 집에서 성내동 국제영어대학원대학교까지 매일 한 시간 반씩 지하철을 타고 다니며 영어를 배우고 있다.

주로 배우는 교과목은 영어 듣기ㆍ말하기ㆍ쓰기 등 커뮤니케이션과 영어평가론,영어교육과 어휘학습,영어교수법 등이다.

환갑이 다 된 나이에 그가 이렇게 영어 공부에 정력을 쏟는 이유는 뭘까.

김 교수는 이 같은 질문에 대해 밑도 끝도 없이 "우주가 유한한지 무한한지 생각해 본 적 있느냐"고 되물었다.

"우주에 끝이 있는지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마음과 내가 영어 공부를 계속하는 마음은 똑같다"는 설명이다.

"아무리 영어를 잘한다 해도 늘 궁금한 것이 있고 문화가 달라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는데,주위에 더 이상 이를 물어볼 사람이 없어 불편했습니다.

2002년 개교한 영어대학원대학교 소식을 듣고 공부를 더 하고 싶다는 열망이 생겼죠."

6 대 1의 경쟁을 뚫고 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했지만 막상 적응하기는 쉽지 않았다.

현대영어사(브랜드 윤선생영어교실)에서 운영하는 국제영어대학원대학교는 전액 무료로 운영되는 대신 50명의 소수 정원을 상대로 강도 높은 교육을 시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졸업 학점이 63학점이니 학기당 16학점 가까이 소화해야 한다.

이 때문에 김 교수는 하루 네 시간만 자고 주말에도 학교에 나와 공부하는 쳇바퀴 생활을 반복하고 있다.

젊었을 때처럼 이틀씩 밤을 새기는 어렵지만 하룻밤을 꼬박 새는 일은 종종 있다.

"솔직히 이렇게 힘들 줄 알았으면 안 왔을 수도 있습니다(웃음).하지만 살인적 분량의 과제와 고3 수준의 강행군을 이겨내는 내 자신이 자랑스럽다고 생각하니 못할 게 없더군요." 김 교수는 여기서 체계화시킨 영어 실력과 오랫동안 외교관으로 생활하며 얻은 협상 노하우를 바탕으로 졸업 후 영어 협상의 기술에 관한 책을 쓸 계획이다.

"세상 마지막 날이 오더라도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스피노자의 말처럼 '너무 늦은' 시기는 없습니다.

다만 저처럼 늦은 나이에 공부하는 사람은 그만큼 자기 모든 것을 쏟아부어서 공부해야 젊은 사람들을 따라갈 수 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이상은 기자 se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