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례문 화재 이후 가진 모임에서였다.

대기업 임원이 지난 일을 털어놨다.

종합상사 근무 시절,미국에서 화재를 비롯한 각종 비상사태 시 책임자가 없어도 누구든 그대로 따라하기만 하면 되는 매뉴얼 작성용 소프트웨어를 발견하고 수입하려 했으나 사겠다는 곳이 없어 포기했다는 얘기였다.

의아해 하던 참석자들이 곧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의 경우 정부기관과 민간기업 할 것 없이 과장급만 돼도 "내가 없으면 일이 마비돼야지,그래야 내가 중요한 줄 알지" 싶어 작은 노하우도 숨기기 일쑤니 내가 없어도 문제 없게 만드는 소프트웨어를 구입할 리 만무였겠다는 것이다.

특정 업무 수행에 필요한 지침을 담은 매뉴얼(교본,편람)은 담당자 변경 혹은 부재 시에 발생할 수 있는 시행착오나 불상사를 줄인다.

업무 도중 얻거나 깨달은 실천적 항목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면 그 가능성은 더욱 높아진다.

행정안전부에서 펴내는 책자 가운데 '장관 직무 가이드'라는 게 있다는 소식은 그래서 관심을 끈다.

역대 장관들의 경험,관련 자료 등을 기초로 했다는데 알려진 대목들을 보면 흥미롭다.

'장관이 되기 전과 후는 달라야 한다'는 특히 눈에 띈다.

돌출 발언과 파격 행동은 장관으로 발탁되는데 유용할 진 몰라도 장관이 된 뒤엔 장관직 수행을 방해하거나 망치는 요인이 된다는 지적이다.

다른 부분도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연상시킬 만큼 현실적이다.

장관으로서 성공하려면 충분한 재임기간 확보 및 이를 위한 대통령의 지지가 우선이라고 강조한 것도 그렇고,임용 초와 3개월 6개월 단위로 조심하고 신경 써야 할 일을 적시하고 국회와 언론 대응책을 명기한 것도 그렇다.

2002년부터 냈다니 그대로 했으면 성공한 장관이 많았을 듯한데 사정은 다르다.

매뉴얼보다 자기 식대로 했기 때문일지 모른다.

'장관 직무 가이드'의 상당부분은 새 업무를 맡은 관료나 기업 책임자가 알아야 할 사항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선험에 따른 교본 챙기기는 성공도 성공이요 실패를 막는 첫째 요건이다.

박성희 수석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