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창업주 고(故) 이병철 회장은 1938년 3월22일 대구 중구 인교동에 지하 1층, 지상 4층 목조건물을 세워 '삼성상회'라는 명패를 달았다.

일본 와세다(早稻田)대를 졸업한 28세 청년은 청과물과 건어물, 국수를 파는 것으로 사업을 시작했지만 그 업체는 지금 국내를 대표하는 글로벌 대기업 삼성의 모태가 됐다.

삼성이 22일로 창업 70주년을 맞는다.

사람의 연령으로 치면 고희(古稀)다.

과거에는 그 나이까지 장수하는 게 드물었다고 해서 70세를 일컬어 고희라고 부른다.

명멸을 거듭해온 국내 기업사를 봐도 70년 연명은 상당한 의미를 지닌다.

그런 삼성이지만 올해 고희를 기념하는 잔치는 없다.

여느 기업이거나, 삼성에 다른 평온한 시기였다면 사사 발간에 창업 기념식, 임직원 포상 등 다양한 자축행사나 이벤트가 있을 법하겠지만 지금 삼성은 그럴 처지가 아니다.

비자금 조성과 로비 의혹, 경영권 승계 논란에 대한 삼성 특검의 강도높은 조사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성의 70주년을 돌아보는 것은 국내 기업사 측면에서 여러 가지 시사하는 바가 적지않다.

삼성은 70년 전과 비교할 때 '천지가 개벽했다'고 할 정도의 무서운 성장과 변신을 이뤄냈다.

청과물과 건어물을 팔던 창업시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반도체, LCD, TV, 휴대전화, 모니터 등 첨단 전자제품 분야에서 세계무대를 호령하고 있다.

그 덕에 경영통계 수치만 보더라도 창업 30주년이던 1968년 연간 220억원에 그쳤던 매출은 50주년이던 1988년 20조1천억원을 찍고 2006년말 현재 152조원으로 성장했다.

수출 역시 1968년 28억원이던 것이 1988년 9조원으로 커진 데 이어 2006년에는 63조원으로 늘었다.

고용인력도 같은 기간 7천명 → 16만명 → 25만명으로 증가했다.

시가총액은 2006년말 기준 140조원을 넘어섰고, 브랜드 가치는 작년 말 현재 169억 달러를 기록했다.

삼성이 국내를 대표하는 글로벌 기업이라는 점을 방증하는 수치들이다.

"지난 70년간 냉혹한 국제경쟁 속에서 한국의 희망을 심으며 국내 대표기업에서 글로벌 일류기업으로 성장해온 삼성의 역사는 한국의 기업사이자, 한국민의 생활사, 글로벌 경영 개척사로 요약할 수 있다"는 삼성맨들의 자부심이 대단한 것은 이런 배경이 깔고있다.

실제 삼성의 역사는 한국 기업사와 맥을 같이 했다.

경공업 → 중화학공업 → 전자업 → 첨단 IT업는 삼성과 한국 기업사는 나란히 궤적을 함께 하고 있다.

삼성이 일제강점기 농수산물 무역에서 출발해 해방후 제당.모직사업에 손대고 이후 전자, 첨단 IT업을 확장해 나간 것은 한국민들의 생활 변화와 맥을 같이 한다.

삼성이 1953년 국내 최초의 해외거점으로 삼성물산 도쿄(東京)지점을 열고 1992년 반도체 분야 D램 세계 1위에 오른 이후 지금까지 이를 지키고 있는 데 더해 2000년 시가총액과 2005년 브랜드가치 면에서 일본의 대표기업 소니를 추월한 것은 글로벌 경영의 개가로 평가되는 대표 사례들이다.

특히 이건희 회장이 '대권'을 넘겨받은 이듬해인 1988년 시작된 '제2창업', 1993년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라'는 프랑크푸르트 선언과 신경영 등으로 내달린 '이건희 시대' 20년의 삼성 변화는 그야말로 글로벌 초일류 기업으로 나아가는 '대장정'이었다.

하지만 삼성은 지금 전례없는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

IMF 사태, 2002년 대선자금 수사, 안기부 'X파일' 사태, 에버랜드 전환사채 사건 등 숱한 고비를 넘겨왔지만 삼성 전 법무팀장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와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삼성개혁 촉구, 특검의 강도높은 수사, 그리고 상당수 여론은 삼성에 '큰 결단'을 촉구하는 흐름이다.

이건희 회장이 최근 몇년새 강조하고 있는 창조경영이 이 시대 눈높이와 글로벌 초일류 기업에 걸맞은 윤리경영과 합리적 경영지배구조 마련에서도 '창조력'을 발휘할 것을 주문하는 이들이 적지않다는 것이다.

삼성 관계자는 20일 특검 이후 이런 여론에 대한 삼성의 '해답'을 묻는 질문에 "일반의 예상을 뛰어넘는 강도높은 대안을 내놓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이 언급이 삼성의 분위기를 정확히 대변하는 것일 지는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알 수 있겠지만 삼성이 실제로 '제3창업'에 준하는 대결단으로 새로운 거보를 내디딜 수 있을 지 주목된다.

(서울연합뉴스) 고형규 기자 uni@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