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콘텐츠 두마리 토끼 모두 놓칠라" 우려도
`필요한 과목ㆍ적정 수준은 OK…그러나…과유불급(過猶不及)'

사건팀 = 정부의 영어교육 강화 방침이 발표된 뒤 `영어 지상주의'에 대한 논란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새 학기를 맞은 각급 학교에는 영어 열풍이 휘몰아치고 있다.

초등학교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앞다퉈 영어수업을 확대하고 있지만 그 효율성을 놓고는 찬반 의견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영어수업이 확대될 초ㆍ중등학교와 영어전용 강의 수가 경쟁력을 재는 지표로 통하는 대학들, 어느 쪽 할 것 없이 실적에 떼밀려 영어 수업의 양과 질이란 두 마리 토끼 모두를 놓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따라서 영어교육의 현 주소를 점검하고 바람직한 방향을 생각해보기 위해 일선 학교의 영어수업 실태를 심층 취재했다.

◇ 초등학교 "영어수업은 OK, 몰입식은 위험"

지난 7일 서울 신상도초등학교 6학년 8반 교실.
교사가 학생들에게 "Where does she live? 그녀는 어디서 살고 있나요?"라고 우리말을 섞어 묻자 학생들은 China, Japan 등 짧은 영어로 답했다.

잠자코 있는 학생들에게는 한 명씩 지명해 "Mr. Kim, would you please answer this question?"이라는 등의 질문이 돌아갔다.

"`6 years ago'가 예순살이라고? No! It means 6년 전(6년 전이란 말이야)."
이처럼 잘못된 답변이나 수업 태도를 지도하고 제대로 설명을 해주려면 우리말을 함께 써야 한다는 게 교사의 설명이다.

이 학교 3, 4학년은 1주일에 한 번, 5, 6학년은 1주일에 두 번 영어수업을 각각 한다.

대다수 초등학교는 이처럼 특별활동이나 재량활동 형태의 영어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신상도초교는 학생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5, 6학년 수업 중 한 번은 한국인 교사가 맡고 한 번은 원어민과 한국인 교사가 함께 진행한다.

3, 4학년 수업은 영어와 우리말을 절반씩, 5, 6학년은 영어를 70% 쓴다.

사진 등을 활용한 놀이식 수업이 대부분이다.

교사 송선미씨는 "영어 연습을 많이 하는 건 좋지만 몰입식 교육은 재고할 부분이 있다"며 "아이들이 처음에 접하는 개념을 제대로 이해해야 하는데 인생에서 한 번 밖에 없는 기회를 두고 `실험'을 해서는 되겠느냐"라고 반문했다.

서울 광남초등학교는 일반교과에도 원어민 교사를 투입해 수업을 하는 `영어 몰입식 교육 시범학교'로 선정돼 3학년 8개반, 4학년 9개반을 대상으로 수학을 1주일에 한 번씩 영어로 수업하고 있다.

광남초 김선진 교감은 "국가적으로 영어 교육에 관심이 많은 상태이고 교육체계도 그 쪽으로 흘러가고 있으니 일반 교과목도 원어민을 투입해 해볼 만 하다고 생각해 몰입식 교육을 하기로 했으며, 충분히 잘 해낼 자신이 있다"고 말했다.

학부모들 사이에선 사교육비 부담 가중 등을 예상해 걱정하는 목소리가 많은 편이다.

학부모 김경숙(39)씨는 "저학년은 우리말로 시작해 고학년으로 가면서 점차 영어를 늘려가는 게 정서적으로도 바람직하다"며 "그렇지 않으면 입학 전부터 영어 사교육에 불이 붙을 게 뻔하다"고 말했다.

요즘 초등학교 정문에선 ○○○영어교실 영업사원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학부모들에게 교재를 보여주며 "일찍 기초를 잡지 않으면 뒤떨어진다"며 회원 가입을 권유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 중ㆍ고교…우열반 논란에 교사체면도 부담

영어수업을 둘러싼 논란이 가장 뜨거운 곳은 중ㆍ고교.
영어를 잘 하는 학생과 그렇지 않은 학생이 확연히 갈리면서 학교는 우열반 체제를 기획하고 있지만 학생과 학부모의 합의를 이끌어내기 힘든 데다 영어 구사능력이 학생보다 떨어져 체면을 구기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교사들도 적지 않다.

건국대부속중학교 박형만 교사는 "교사 말을 알아듣는 학생이 극소수일 뿐 아니라 실제 도움이 되는 학생은 한 반에 1∼2명 정도에 그친다"며 "우열반을 편성해야 하는데 열반 학생들은 `소귀에 경읽기' 수준"이라고 전했다.

일부 교사들은 "학부모들이 혹시 우리 애가 덜 배우는 게 아닐까 싶어 왜 열반에 넣었냐고 반발할 수도 있을 것"이라며 "수준별로 반을 나누는 것 자체가 공교육 차원에서는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하지만 강남과 목동 등 사교육이 보편화된 지역의 학생들은 이미 영어전용 수업을 소화하고 있고 참여도 또한 매우 높다.

지난 7일 강남구 대치동 휘문중의 영어수업에서는 신학기 첫 수업인 만큼 영어로 자신을 소개하는 시간이 한창이었다.

"What is your rank in Sudden Attack?(서든 어택 게임에서 계급이 뭔가요?)"
자기소개서를 달달 외는 학생들을 보며 교사가 질문을 던지자 학생이 답한다.

"What was that in English..상사.."라고 머뭇거리자 친구들이 "Master Sergeant!!"라고 대신 답을 한다.

휘문중 이현숙 교사는 "우리 학교는 대치동이라는 특색이 잘 반영된 곳이다.

실습이 중요하다는 소신으로 오래 전부터 영어전용 수업을 하고 있는데 대부분 애들이 잘 따라온다"고 했다.

교사들 사이에선 영어수업 의무화가 시작되면 강북 등지에서는 우열반 문제와 교사들의 영어 말하기 능력 문제가 뒤섞이면서 적지 않은 혼란이 빚어질 것이라는 관측이 벌써부터 쏟아지고 있다.

◇ 대학 `영어로 강의' 과열

같은 날 한양대 국제경제법 수업.

인사와 출석 체크가 우리말로 끝난 뒤 바로 영어로 강의가 시작됐다.

영어와 한국어 교재를 동시에 펼쳐놓았지만 수업은 영어 토론식으로 이뤄졌다.

교수의 영어질문에 당황하는 학생은 드물었지만 답변 가운데 `최혜국 대우'처럼 미처 모르는 영어를 우리말로 섞어 대답하는 모습이 간간이 눈에 띄었다.

강의를 맡은 이재민 교수는 "어차피 나중에 영어로 하자고 배우는 것이므로 국제와 관련된 강의는 영어로 할 때 효과가 더 크다.

하지만 민법 같은 건 우리말로 하는 게 더 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강의를 듣던 신혜준(26)씨는 "영어와 국제법을 동시에 공부할 수 있어 만족한다.

조금이라도 흐름을 놓치면 걷잡을 수 없기에 더 집중하게 된다"고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각 대학은 수년 전부터 해마다 영어전용 강의 비율을 높이고 있으며 신규 임용 교원과 입학생에게 영어강의를 의무화하거나 영어강의를 하는 교원에게 평가업적 가점 등 인센티브를 주고 있다.

대학들이 이처럼 영어강의에 열을 올리는 이유는 영어전용 강의 수가 각종 대학평가에서 `국제화 지표'로 사용돼 대학 서열을 가리는 데 작용하기 때문이다.

한 주요대 관계자는 "위에서 영어강의 비율을 30%까지 맞추라고 지시가 내려와 영어전용수업이 올해만 수백 개 늘었다.

대학들이 서로 비교되고 서열화되는 게 싫어 자료를 공유하거나 외부에 공개하는 걸 매우 꺼리고 있다"고 털어놨다.

현재 영어전용 강의 비율은 2007년 2학기 기준으로 고려대가 37.7%로 가장 높고 서울대가 10%로 예상보다 낮은 가운데 다른 주요 대학은 10∼20% 수준이다.

영어로 개설된 과목은 대체로 국제경제법, 미적분학, 미국과 영국의 문화사 등 원서 내용이 자연스럽게 영어수업으로 이어지는 게 많지만, 동양철학, 동양사 입문, 한국사, 한국사회운동사 등 엉거주춤하게 영어강의에 편입된 수업도 적지 않다.

이에 따라 전공학습과 영어실습을 동시에 할 수 있다는 이점을 들어 영어전용 강의 신청을 하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우리말 강의를 했을 때 효과가 최대인 과목이 영어로 진행되는 데 불만을 토로하는 학생도 적지 않다.

고려대 이영화(24.한국사 수강)씨는 "한국사가 우리말로도 정확한 의미를 잘 모르는 말을 영어로 어떻게 표현하는지 궁리하는 수업이 되는 게 바람직한지 의문"이라며 "`임진왜란', `을미사변' 같은 말을 하면서 혀를 꼬부리는 교수나 학생을 보면 기가 찰 따름이다"라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 jangje@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