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복폭행 혐의로 29일 경찰에 불려가 조사를 받은 김승연 회장은 1981년 불과 29세의 나이로 한화그룹(당시 한국화약그룹) 회장에 오른 뒤 온갖 풍상을 겪으면서도 한화그룹을 매출액 8조1천억원(금융업 제외 2005년말 기준, 재계 14위), 자산 12조원(11위)의 상위권 그룹으로 성장시켰다.

물려받은 가업을 망치고 이름도 없이 사라져간 재벌 2세들이 수없이 많다는 점을 감안할 때 4반세기 이상 무난하게 기업을 이끌어왔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크게 성장시켰다는 점에서 그의 '경영능력'은 생존경쟁을 통해 입증된 셈이라고 할 수 있다.

경기고, 미국 멘로대(경영학과) 및 드폴대대학원(국제정치학과) 졸업이라는 학력과 한국화약의 설립자로 국내 산업화초기 주역이었던 부친 고(故) 김종희 회장, 장인인 서정화 전 내무장관 등 쟁쟁한 집안의 인물들,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과 유엔한국협회 회장, 한미교류협회 회장 등 일일이 세기도 어려울 정도의 직함들은 그가 '현대사회의 귀족'이라고 불러도 좋을 엘리트임을 잘 말해준다.

이처럼 '든든한 배경'에서 비롯된 자신감과 카리스마, 날카로운 판단력에서 비롯된 '타이밍' 포착, 한번 결정을 내리면 과감하게 밀어붙이는 추진력이 그가 거둔 성공의 주된 요인이라고 재계에서는 평가한다.

김 회장은 취임 1년만에 제2차 석유화학 파동으로 경영난에 빠져 있던 한양화학(현 한화석유화학)을 전격인수함으로써 결단력과 추진력을 과시했다.

많은 사람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한화석유화학은 성공적으로 안착해 지금은 한화그룹의 주력계열사로 자리잡았다.

김 회장은 한국경제를 강타한 IMF 위기 이전에 이미 혹독한 구조조정에 착수해 '알짜사업'으로 불리던 경인에너지 등 계열사와 사업부문을 정리하는 결단을 단행했다.

이 때문에 그룹 순위가 20위권 밖으로 밀려나면서 사세가 급격히 위축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당시의 뼈를 깎는 구조조정으로 강화된 체질은 IMF 위기를 견뎌내고 대한생명 인수로 대표되는 '그룹 중흥'을 맞는 토대가 됐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성공신화'의 이면에는 부정적인 일화들도 적지 않았다.

그룹분리 과정에서 빚어진 형제간 다툼, 대한생명 인수를 둘러싼 로비의혹, 대선자금 수사 국면에서의 '도피성' 장기 출국, 외화를 빼돌려 미국에 호화주택을 구입한 사건 등이 대표적이다.

개인적인 캐릭터도 다정다감함과 불같은 성격을 동시에 지녀 그룹 안팎에서 그에 대한 평가는 어떤 면을 보고 겪었는지에 따라 극단적으로 엇갈린다.

보도를 통해 '기러기 아빠'의 딱한 사연을 접하고 비슷한 처지에 놓인 임직원들에게 특별휴가와 여비를 지원해 가족 상봉의 기회를 준 것은 그의 다정다감함을 잘 보여준 에피소드로 회자되고 있다.

그의 유별난 자식사랑도 성격의 따뜻한 일면을 잘 보여준다.

하버드와 예일, 승마명문학교인 태프트스쿨(고교)에 다니는 세 아들을 유난히 자랑스러워 해 개인 홈페이지에도 자식들과 찍은 여러 장의 사진을 올려놓을 정도다.

그러나 이 같은 감성 위주의 캐릭터는 때로는 분노나 열정의 분출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 그를 잘 아는 재계 인사들의 지적이다.

'보복폭행' 사건이 극단적인 사례다.

한편 그룹 규모 이상의 스포츠 활동과 사회공헌 활동을 통해 비교적 양호한 이미지를 구축해가던 한화그룹은 이번 사건으로 인해 큰 타격을 입게 됐다.

한화는 대한생명 인수를 계기로 제조.건설, 금융, 서비스.레저 등의 사업포트폴리오를 갖추는 한편 올해들어서는 '트라이서클'의 새 기업이미지(CI)를 선포하고 제2의 도약을 위해 분발을 다짐하던 참이었다.

한화는 이를 위한 핵심 과제로 현재 10% 선인 해외매출의 비중을 2011년까지 40%로 확대한다는 야심찬 목표를 세우고 전계열사가 세부 실천계획을 가다듬고 있으나 이번 사태로 이 또한 적지 않은 장애에 봉착할 전망이다.

(서울연합뉴스) 추왕훈 기자 cwhyna@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