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봐도 정상인의 모습은 아니었다.

성명서를 읽는 조승희씨의 눈매에는 광기가 묻어났고 웅얼거리는 듯한 목소리엔 섬뜩함이 숨어 있었다.

미국 NBC방송이 18일(현지시간) 공개한 조씨의 동영상에는 세상에 대한 울분,부자에 대한 반감,타인에 대한 저주가 두서없이 뒤엉켜 있었다.


◆증오의 '셀프 카메라'

우편물 속에는 1800자 분량의 선언문 형태의 편지와 비디오파일 27개로 이뤄진 10분 분량의 DVD 녹화물 및 43장의 사진이 담겨 있었다고 NBC는 밝혔다.

DVD 동영상은 조씨 자신이 카메라에 대고 직접 얘기하는 '셀프카메라' 형식으로 만들어졌으며 43장의 사진 가운데 처음 두 장은 보통의 대학생들처럼 웃는 모습을 담았으나 나머지 41장에는 '전사의 이미지'를 강조하려는 듯 단호한 표정을 담았다.

여기엔 범행에 사용한 것과 동일한 권총을 겨누는 사진도 들어 있었다.

알카에다 등 자살 테러범들이 인터넷 등을 통해 자신들의 범행 동기를 밝히고 정당화하는 수법을 전형적으로 모방한 셈이다.


◆분노의 단어들


"시간이 됐다.거사는 오늘이다. 당신은 오늘과 같은 참사를 피할 수 있는 천억 번의 기회가 있었다 …." 조씨가 동영상을 통해 전달하고자 한 선언문은 이 같은 자기 합리화로 시작한다.

총기 살인의 원인을 남의 탓으로 돌림으로써 반인륜적인 범죄에 대한 정서적 불안감이나 괴로움을 털어내려고 한 흔적으로 보인다.

선언문은 곧 이어 세상에 대한 끝없는 분노와 피해의식으로 채워졌다.

"누가 얼굴에 침을 뱉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알아? 목구멍으로 쓰레기를 넘기는 기분,자기 무덤을 파는 기분이 어떤 건지 알아? 양쪽 귀까지 입을 찢기는 기분은 알아?"라는 표현을 통해 조씨는 자신이 그동안 겪은 고통을 표현하려 했다.

"벤츠 자동차로도 부족했어? 금목걸이가 충분치 않았나? 이 속물들아! 보드카와 코냑으로도 부족했나?"라는 대목에서는 부자에 대한 적개심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조금씩 짜 맞춰지는 퍼즐



그동안 베일에 싸여 있던 1,2차 범행 사이의 '사라진 두 시간'의 공백도 상당 부분 메워졌다.

이 소포는 범행 당일 오전 9시1분의 우체국 소인이 찍혀 있다.

이는 1차 범행 이후 1시간30분이 지난 시각이고 2차 난사 30분 전이다.

즉 조씨가 첫 범행 뒤 편지와 동영상,사진을 담아 우체국에 소포 발송을 접수시킨 뒤 다시 2차 범행에 나선 것으로 볼 수 있다.

FBI는 우편번호가 잘못 기재돼 우편물이 예정보다 늦게 방송국에 도착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범죄의 성격도 '치정에 의한 우발적인 사고'에서 '반사회적인 계획 범죄'로 옮겨가는 분위기다.

NBC는 동영상에 등장하는 옷차림과 편집에 들어가는 시간 등을 고려할 때 동영상은 최소한 6일 전에 제작됐을 것으로 추정했다.

조씨는 동봉한 편지에서 1993년 13명의 학생과 교사를 사살,미국 전역을 충격에 빠뜨렸던 총기 난사 사건의 범인인 에릭 해리스과 딜런 클레볼드 두 학생을 '순교자'로 묘사,모방의 흔적도 드러나고 있다.

안재석 기자 yag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