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도권 경쟁 극복할 치밀한 전략 요구

"합의하는 주체들이 언제든 상황을 바꿀 수 있는 것이다."

방코델타아시아(BDA) 북한 자금 송금 문제로 6자회담의 실천적 문서로 평가받는 `2.13합의'의 의미가 퇴색해질 위기에 처한데 대해 송민순 외교통상부 장관은 11일 정례브리핑에서 `탄력성'을 강조했다.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시적인 다자협의체로 출발한 6자회담에서 합의한 문서는 참가국들이 "양해하고 합의하면" 수정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런 시각은 미국에서도 나왔다.

숀 매코맥 국무부 대변인은 12일 `2.13합의' 시한은 협정이 아니라 관계당사국들의 협의에 의해 변경될 수 있는 '정치적.외교적 약속'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외교가의 시선은 냉정하다.

6자회담이 임시적으로 운영되는 협의체인 만큼 여기서 합의되는 내용은 상설 협의체에 준하는 구속력을 가져야 신뢰성이 담보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6자회담의 중요한 합의가 어떤 이유에서든 무색해지는 상황에 대해 외교 전문가들은 "좋지 않은 선례를 남기는 것"이라고 걱정하고 있다.

BDA 난관이 어렵게 극복돼 다시 6자회담이 정상화되고 추후 또다시 중요한 합의를 도출해내더라도 합의이행을 장담할 수 없게 될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이처럼 2.13 합의 도출 이후 이른바 '60일 이행시한'(14일)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가능성과 함께 한계도 분명히 드러냈다.

합의에서 규정한 분과별 실무그룹회의가 구성되고 뉴욕과 하노이에서 북.미, 북.일간 관계정상화 회담이 열리고 다시 베이징에서 에너지.경제지원, 동북아 평화.안보체제, 비핵화 실무그룹회의가 잇달아 개최되면서 그야말로 "이제야 제대로 된 실천이 이뤄지는구나"는 평가가 나왔다.

특히 클린턴 행정부 당시 미국땅을 밟은 조명록 차수 이후 가장 높은 북한의 고위직에 해당하는 김계관 외무성 부상을 맞이하는 미국의 `극진한 의전'을 보면서 북.미 관계 정상화가 `아주 가까운 시일'내 현실화될 것이라는 전망이 쏟아졌다.

'연내 북.미간 수교'나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의 평양방문, 나아가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간 회담 가능성마저 제기됐고 남북한과 미국, 중국이 참여하는 4자 정상회담 얘기까지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로 평가받을 정도가 됐다.

이는 곧 냉전의 마지막 남은 섬인 한반도에 신질서가 구축되고 그 안에 사는 한국인의 삶을 새롭게 규정하는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사건으로 다가왔다.

보수적인 대북정책을 견지해왔던 한국내 일부 정파까지도 `해빙기를 맞은 한반도'를 현실로 받아들이는 움직임을 가시화했다.

하지만 다소 성급하고 부풀려진 이런 희망은 BDA 암초로 인해 급속히 냉각됐다.

지난달 19일 베이징에서 대니얼 글레이저 미 재무부 부차관보와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차관보가 BDA 해법을 발표할 때만 해도 BDA 문제가 이처럼 큰 장애가 될 지는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하지만 북한은 완강했다.

독특한 논리를 견지하면서 미국의 거듭된 설득을 외면했다.

외교전문가들이 분석한 북한의 논리는 어쩌면 단순해 보인다.

2.13 합의 이행을 위한 60일 시한은 전반부 30일간 BDA 문제를 해결하고 나머지 30일은 비핵화 초기조치를 이행하는 것으로 구분된다.

따라서 미국의 최종해법으로 BDA 문제가 해결되더라도 북한은 비핵화 초기조치 이행을 위해 30일의 이행시간을 요구할 수 있을 것이란 얘기다.

실제 북한은 빌 리처드슨 미국 뉴멕시코 주지사 일행에게 영변 원자로 폐쇄를 포함한 자신들의 의무 이행시한을 `30일 연장하기를 희망한다'는 메시지를 전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렇게 보면 BDA 문제가 조만간 해결되더라도 초기조치가 이행되기까지는 여전히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이란 예상도 충분히 가능해 진다.

또 국제원자력기구(IAEA) 감시단이 북한으로 들어가 본격적인 핵시설 폐쇄조치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북한측과 어떤 신경전을 벌일 지 모르는 상황이다.

더 나아가 2.13 합의의 목표라 할 수 있는 핵시설 불능화까지 이르는 과정에서 숱한 난관이 돌출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결국 60일 이행시한을 지키지 못하는 일과 같은 상황이 언제든 재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될 경우 현재처럼 "2.13합의 이행에 대한 북한의 정치적 의지는 여전히 강력하다"는 말로 위안을 삼기에는 현실이 녹록지 않다.

북한의 체제전복을 원하는 워싱턴의 매파들이 다시 고개를 들 가능성도 높아지고 한국내 보수세력의 대반격도 이뤄질 수 있다.

특히 정권말로 치닫고 있다는 점에서 현재의 협상기조를 유지할 한국과 미국 정부의 능력도 그만큼 떨어지게 될 상황이다.

따라서 시의성있게 2.13합의 이행을 추진할 정밀한 전략이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시점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대북협상에 정통한 한 소식통은 "지난해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 강행, 그리고 협상으로 복귀, 2.13 합의 도출 등의 과정을 보면 미국은 물론 한국의 협상 전략이 지나치게 신축적으로 구사된 느낌"이라면서 "협상상대인 북한의 셈법을 의식한 냉철한 전략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소식통은 "북한은 자신들이 유리한 이슈를 물고 늘어지는 경향이 있다"면서 "따라서 민감한 이슈에 대해 사전에 치밀하게 북한을 유인할 카드를 다양화하는 대책이 요구된다"고 말했다.

BDA 문제만 하더라도 '정치적으로 해결한다'는 원칙을 제시하면서도 한꺼번에 2천500만달러를 다 내주지 말고 합법자금부터 일단 북한 손에 쥐어주고 북한과 협상하는 `인센티브 전술'을 구사했어야 하지 않느냐는 지적이 일고 있다.

90년대 중반 발생한 1차 핵위기가 제네바 합의로 봉합됐지만 결국 북.미 양측의 신경전 속에 합의 자체가 물거품이 된 채 2차 핵위기가 일어난 불행한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을 지혜와 책략이 어느 때보다도 요구되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이우탁 기자 lwt@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