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권기자. 요즘도 바쁜가? 강남 한번 오라니까…. 아니, 나도 정신없어. 쉬는 사람이 더 바쁘다니까…."

현직 시절에는 아무리 전화를 해도 잘 만나주지도 않던 대기업 사장 출신 Y씨는 세 달에 한 번꼴로 전화를 한다. 그 때마다 이런 식이다. 심심한 모양이다.

돈이 없는 것도 아니다. 퇴직금이 보통 직장인들이 상상할 수 없는 액수였다. 그러나 먹고 살기엔 지장없지만 사업하기엔 약간 모자라는 수준이란다. "사업이라도 벌이면 옛부하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기 때문에 딱 그 정도로 맞춘 것"이라는게 그의 설명. 그러면서 Y씨는 "사업을 했으면 100% 망했을 것"이라고 했다. "회사에서 배운 것이 없어서 그렇다"는 그의 말이 다소 의아했지만 생각해보니 그건 사실이었다.

회사에선 일과 관련된 것만 가르쳐준다. 회사를 나간 이후에,은퇴한 뒤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서 방향을 잡아주는 회사는 거의 없다. 전직 이후 직업 설계를 도와주는 아웃플레이스먼트(outplacement)의 경우도 노동조합 힘이 센 곳이 아니면 기대하기 어려운 서비스다.

이런 현실이다 보니 회사에서 성공적인 간부일수록 사회 경쟁력이 떨어지는 현상이 벌어진다. 실제가 그런 것이,40대를 넘어서면서 기존의 인맥 네트워크가 큰 도움이 되지 않는 데다 바쁜 일과 때문에 업무 파트너 외에는 새 사람을 잘 만나지 않게 된다. 회사 일은 더욱 잘하게 되지만 세상과의 벽은 오히려 공고해진다. 그러다 보니 회사를 나가는 순간 혼자서는 아무 일도 못하는 멍청한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이다.

사실 이런 난감한 경험은 직장인이라면 누구라도 회사 생활 초기에 겪었던 일 아닌가. 뛰어난 대학생이 회사에 들어오자 마자 멍청한 신입사원으로 순식간에 바뀌는 것은 지금도 봄이 오면 회사 사회에서 매일 같이 벌어지는 풍경이다.

분명한 것은 회사에서 알아야 할 것 중 대학에서는 물론 회사에서도 절대 가르쳐주지 않는 것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부장이 직접 짠 새로운 기획안을 보여주며 "당신 생각은 어때?"라고 물을 때 무조건 좋다고 말해야 할지,아니면 '솔직한' 느낌을 얘기해야 할지 신입사원은 자기 혼자 힘으로는 판단하기가 어렵다. 1,2년 선배에게 묻자니 "이제 막 들어온 친구가 눈치보는 법부터 배우냐?"는 질책이 떨어질까 두렵다. 그래서 부장에게 답도 못하고 어물어물하고 있다가 "대학 나온 것 맞냐?"는 질책을 받게 되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직장인들은 그러니까 회사에서 필요한 것을 아무 것도 모르고 회사에 들어왔다가,회사일에 필요한 것만 배우다가 다시 세상에 던져지는 사이클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회사나 조직을 탓할 일도 아니다. 회사에서는 회사에 필요한 일만 잘 돌아가면 그만인 것이다. 스스로를 하나의 회사로 생각하는 자기경영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끊임없이 자기의 가치를 높이며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과 교류하는 버릇을 들여야 한다. 만나기 싫은 사람도 만나야 하고 자기만의 경쟁력 제고 장치를 만들어 놓아야 나중에 안심할 수 있다는 얘기다.

최근 회사가 알려주지 않는 출세 비밀류의 책이 직장인들에게 입소문으로 번지며 인기를 끌고 있다. Y씨를 만나보니 이해가 갔다. 이래저래 회사에 목숨을 거는 '회사 인간'이 점점 사라지는 건 분명 대세인 것 같다.

권영설 한경 가치혁신연구소장 yskw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