咸仁姬 < 이화여대 교수·사회학 >

가을이 깊어 간다. 평균 기대수명은 속절없이 늘어만 가는데 치열한 경쟁이 펼쳐지는 무대마다 여전히 '사오정'이요 '오륙도'라 하니,인생의 가을녘에 서 있는 중년들로선 짙푸른 가을하늘을 바라보기만 해도 눈이 시려오고,타들어가는 단풍 앞에 서기만 해도 가슴이 답답해 옴을 숨길 길이 없을 게다. '오래 살게 되었는데 빨리 퇴장하라'는 사회변화의 흐름은 개개인에겐 가혹한 선택지(選擇肢)만을 제공하고 있는 듯하다.

1945년 2차 세계대전 직후 출생한 베이비 붐 세대가 2005년 이미 환갑 나이에 접어들게 된 미국은 오늘날 '그레이 아메리카'란 애칭을 얻게 됐다. 이들 베이비 붐 세대 10명 가운데 1명이 100살을 넘길 것이란 예상이 나오면서,미국에선 생애주기 전반에 걸친 패러다임의 재구성을 시작했다.

생애주기 패러다임 변화의 핵심에 '중년'이 자리하고 있음은 의미심장하다. 중년 하면 으레 위기 개념이 오버랩되면서 '중년의 위기'(middle life crisis) 논의가 풍미되던 것이 불과 20여년 전 일인데,오늘날 중년은 진정한 '약진'(breaking point)의 시기로 새롭게 거듭나고 있다.

중년의 위기라 함은 젊은 시절 일에 몰입(沒入)하고 조직에 헌신하느라 자신을 돌보지 않던 남성들 사이에 상실감 내지 허탈감이 차오르면서,겉보기엔 안정된 가정을 꾸리고 사회적 성취를 이뤘음에도 불구하고 내면적으론 공허감과 무력감에 빠지면서 방황하게 되는 현상을 포괄적으로 지칭한다. 중년의 위기를 지나는 동안 다수는 우울증과 자괴감에 빠지고,일부는 외도의 유혹에서 헤어나지 못하며,극소수는 알코올 및 도박 등 중독에 빠져 파멸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최근 중년의 위기 논의가 진전되면서 이는 남성의 전유물만은 아니요 여성들 다수도 비슷한 격랑을 헤쳐 가는 것으로 나타났고,더욱 괄목할 만한 것은 위기를 절호의 기회로 삼아 약진(躍進)에 성공하는 이들이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더 이상 잃어버릴 것 없는 중년 여성들이 화려한 성공담의 주인공으로 부상하고 있음도 흥미롭다.

중년의 위기를 약진의 기회로 전환시켜가는 과정에는 대체로 다섯 가지 유형이 관찰된다고 한다. 첫째는 젊은 시절 감히 추구하지 못했던 과격한 운동에 도전함으로써 스스로 규정해온 한계를 뛰어넘어 자신감을 회복해가는 '모험가 유형',둘째는 규범 및 관습에 충실히 동조하던 것을 멈추고,자신의 진솔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자신만의 스타일을 창조해가는 '지도자 유형',셋째는 그동안 뒤꼍에 방치해온 텃밭을 일구며 사계절 꽃 피우는 기쁨을 누리듯 자신이 숨겨 왔던 예술가적 자질이나 생산가적 재능을 다시금 생활 속에 통합시켜가는 '정원사 유형',넷째는 끊임없이 종교 문학 사상의 세계를 탐색하며 삶의 풍요로움과 영혼의 성숙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는 '구도자 유형',그리고 다섯째는 사회적 역할과 가족의 의무를 우선하느라 미뤄두었던 바,포만감을 느끼는 친밀성 속에서 인생의 의미를 되찾고자 하는 '낭만가 유형'이 그것이다.

이들 유형마다에는 위기를 느끼자마자 서둘러 재빨리 위기 탈출에 성공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먹물이 스며들 듯 위기를 서서히 받아들인 후 현명하게 헤쳐 가는 경우도 있고,못내 위기를 외면함으로써 벼랑 끝에서 떨어져 좌절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중년 시기,사회적 규범의 강제력 및 구속력에서 벗어나 오히려 자율성과 창의성의 폭이 확대되면서 젊은 시절 못지않은 에너지가 솟구친다는 주장이나,중년 이후 뇌 속에 새로운 인지 구조가 구축되는 사례가 보고되었다는 주장엔 솔직히 귀가 솔깃해온다.

이제 10년이 채 지나지 않아 60세에 들어서는 한국의 베이비 부머들이 사회 무대로부터 소리 없이 퇴장하기 보다,중년의 의미를 재정립하고 활력을 재충전하는 데 성공한다면,'젊은 피 수혈' 못지않은 사회적 성장 동력이 될 수 있으리라 희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