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신조(安倍晋三.52)는 전후세대 첫 총리이자 전후 최연소 총리라는 화려한 기록과 함께 일본의 리더로 등극했다.

아베는 1954년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전 총리의 장녀인 요오코(洋子)와 아베 신타로 전 외상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기시는 A급 전범 용의로 투옥됐다가 도조 히데키 등이 교수형에 처해지기 하루 전날 무죄방면된 인물. 1955년 자민당 탄생을 주도했고 추후 총리까지 올랐다가 1960년 대 미.일 안보조약 개정에 반대하는 진보세력의 '안보투쟁' 때 낙마했다.

아베는 기시로부터 정치적 DNA를 이어받았다는 말을 되풀이해왔다.

자민당 우파의 원조였던 기시는 연합국 군사령부(GHQ)가 제정한 '평화헌법'을 대체하는 '자 주헌법'의 완성을 '일본의 진정한 독립'으로 여긴 국가주의자였다.

아베가 '개헌 정권'을 표방한 것은 조부의 유지를 잇는 길이다.

아베는 세이케이대학 정치학과를 졸업, 미국 유학 후 귀국한 뒤 고베 제철소에서 3년반 샐러리맨 생활을 하고 1982년 외상이었던 부친의 비서관으로 정치수업을 받다가 1993년 37세 '정한론'의 진원지였던 야마구치(山口)현 시모노세키(下關)에서 중의원에 출마, 첫 당선됐다.

부친은 마이니치신문사 기자 출신으로 요오코와 결혼한 뒤 정계에 발을 디뎠으며 명(名)외상으로 불려 총리를 예약한 인물이었으나 1991년 병사했다.

하지만 아베는 기시의 외손자, 신타로의 아들이라는 가문의 후광을 빼면 그다지 눈에 띄지 않은 정치인에 머무는 듯 했다.

그랬던 그를 일약 정가의 실력자로 부상시켜 준 계기가 2002년 9월17일 고이즈미(小泉) 총리의 방북.
관방부장관으로서 방북에 동행한 아베는 북.일 정상회담이 끝난 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납치를 인정, 사죄하지 않으면 평양선언에 서명해서는 안된다"고 고집, 결국 사죄를 받아냈고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용기있는 정치인'으로 국민들의 시선을 모았다.

이어 대북 강경발언과 조치로 가장 인기있는 정치인으로 떠올랐다.

지난 7월5일 북한의 미사일발사로 대북감정이 악화, 유력한 경쟁자였던 온건파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전 관방장관이 자진 낙마하면서 사실상 차기 총리를 예약했다.

'일본판 북풍'(北風)의 최대 수혜자였던 셈이다.

'퍼스트 레이디' 아키에(昭惠.44) 여사는 열렬한 한류팬으로 알려져 있다.

큰 체구처럼 호탕한 성격의 '여걸'(女傑) 이라는 평. 술을 전혀 입에 대지 않는 남편과 달리 '호주가'로 남편을 대신해 각종 파티를 주재하거나 모임에 참석, '인맥 구축'에 한몫해왔다.

캐러멜로 유명한 모리나가(森永)제과 마쓰자키 아키오(松崎昭雄) 전 사장의 장녀로 여자 사학 명문인 가톨릭계 세이신(聖心) 여자학원의 초.중.고교, 대학을 마쳤다.

일본 최대 광고회사인 덴쓰(電通)에 근무했으며 1987년 아베와 결혼했다.

그녀가 드라마 '겨울연가'를 즐겨 보았으며 주인공인 배용준과 박용하의 열렬 팬이라는 사실은 아베 장관이 공.사석에서 여러 차례 밝혀 잘 알려져 있다.

일주일에 한 차례 꼴로 한국어를 배우며 간단한 한국어를 말한다.

<프로필>
▲1954년 아베 신타로와 요코(洋子) 부부의 차남으로 도쿄서 출생
▲1977년 세이케이대 법학부 졸업
▲1979년 고베제강소 입사, 뉴욕사무소 연수
▲1982년 외무대신인 부친의 비서관으로 정계 입문
▲1987년 모리나가(森永)제과의 사장의 장녀 아키에(昭惠)와 결혼
▲1991년 부친 사망
▲1993년 중의원 첫 당선
▲2000년 제1차 모리 내각 관방부장관 취임
▲2002년 고이즈미 내각 관방부장관 취임
▲2002년 관방부장관으로서 북.일 정상회담 동석
▲2003년 자민당 간사장 취임
▲2004년 자민당 간사장 대리 취임
▲2005년 고이즈미 내각 관방장관 취임
▲2006년 자민당 총재선거 출마 선언
▲2006년 자민당 총재 당선


(도쿄연합뉴스) 신지홍 특파원 shin@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