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星來 < 한국외대 명예교수·과학사 >

지난해 한국의 미국 유학생수는 세계 제1위였다.

정식으로 비자를 받아 유학중인 사람이 8만명(8만6626명)을 넘는다.

한국은 인도(7만7220명),중국(5만9343명),일본(5만4816명),대만(3만6091명)을 훨씬 앞서고 있으며, 또 이들 5개국이 미국 유학생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인구 대비로 얼마나 많은 한국 유학생이 미국에 가는지 짐작하게 된다.

한국 최초의 미국 유학생은 1883년 미국에 간 유길준(兪吉濬·1856∼1914)이다.

1882년 조선이 최초로 서양 나라인 미국과 국교를 맺고 다음해 미국의 첫 외교관이 조선에 상주하게 되자,조선은 그에 상응하는 조치로 미국에 사절단을 보냈다.

'보빙사'(報聘使)란 이름의 이 사절단은 조선인으로선 최초로 미국을 방문하는 셈이었다.

그 보빙사절단 8명 가운데 유길준이 미국에 머무르면서 첫 유학생이 됐다.

하지만 영어를 배우기 시작한 지 겨우 몇 달 만에 고국의 갑신정변(1884년) 소식을 듣고,그는 서둘러 귀국하고 말았다.

이렇게 시작된 한국인의 미국 유학은 그 보빙사의 또 다른 수행원 변수(邊燧·1861∼1892)가 1887년 미국 메릴랜드대학에 들어가면서 제대로 시작됐다.그는 4년 뒤인 1891년 농학 전공으로 이 대학을 졸업, 한국인으로서는 첫 미국 대학 졸업자가 된다.

그 다음으로는 갑신정변에 가담했다가 망명한 서재필(徐載弼 1864∼1951)이 1893년 처음으로 미국 의과대학을 졸업해 의사가 됐다.

그는 그후 귀국해 독립협회를 만들고 '독립신문'을 창간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한국인의 미국 유학은 일제식민지 내내 위축됐다 해방과 함께 활발해졌다. 특히 전쟁 직후 1956년 시작된 원자력 유학생 파견은 주로 미국을 대상으로 많은 청년과학자들을 국비로 보낸 것이었다.

물론 미국 유학생이 증가한 큰 원인은 반세기 전 시작된 미·소의 우주경쟁 때문이라고 할 만하다.

소련이 1957년 첫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를 지구 궤도에 올리자,이에 당황한 미국은 이공계에 막대한 투자를 시작했고 이는 한국의 청년 과학도들에게 미국 대학에서의 일자리를 만들어준 셈이었다.

국내에서 직장조차 구하기 어려웠던 많은 젊은이들이 조교 자리(통칭 장학금)를 얻어 미국 대학원에 유학할 수 있었다.

내가 미국에 유학할 때쯤(1967년) 주미 한국대사관은 유학생 명단을 작은 책자로 만들어 나눠준 일이 있다.

1000명 정도의 한국인 유학생 주소와 소속대학을 밝혀놓은 기록이었다.

그즘에는 이미 맨손,또는 거의 맨손으로 미국에 건너가 공부를 시작하는 한국 학생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그후 한국의 지속적 경제성장은 미국 유학생 수를 폭발적으로 늘리는 배경이 됐다.

1960년대엔 이런 유학생의 증가가 개발도상국에나 미국에나 마찬가지로 골치 아픈 문제가 되기도 했다. 한국은 물론이고 여러 나라 유학생들이 미국에 주저앉으려고만 했지. 공부를 마친 다음 귀국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두뇌유출' 현상에 대해 개도국은 미국을 원망했고,미국으로서도 자국민의 일자리 때문에 꼭 좋아만 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1966년 미국이 자진해서 한국에 과학기술연구소를 차려주게 된 것은 이 문제를 일거에 해결해보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다. 물론 한국군의 월남 참전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기도 했지만.

그렇게 생겨난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는 미국에서 공부한 한국 과학기술자들의 고국 귀환의 기폭제가 됐다. 그 후 한국의 과학기술 성장은 바로 미국 유학의 열매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정확한 통계는 모르지만 아마 한국의 미국 유학생수는 70년대 초엔 1만명에 육박했고,그것이 4반세기 동안 10배나 늘었다고 생각된다.

이런 놀라운 한국인의 미국 유학 열풍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어린이 조기유학까지 늘어만 가는 요즘 세태로 보면 앞으로도 당분간 한국인의 미국 유학은 증가세를 이어갈 것이다. 한국인의 미국 유학 열풍은 미래 한국의 중요한 지표가 될 것이며,연구해 볼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