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의 경제 양극화가 진행되면서 부유층과 빈곤층의 격차가 날로 심화되고 있다. 미국의 컨설팅회사인 캡 제미니와 투자은행 메릴린치의 공동조사에 의하면 스위스의 억만장자는 18만5천명에 달한다. 이들은 총인구(732만명)의 2% 남짓에 그치고 있지만 국부의 약 90%를 점하고 있다. 개인별 자산은 최저 1천200만 프랑이고 여기에는 부동산은 포함돼 있지 않다. 소득이 국가 평균의 50%에 미치지 못하는 빈곤층은 약 85만명으로 11명당 1명꼴이다. 여성의 비율은 18%다. 빈곤층을 구성하는 것은 식구가 많은 가정, 2-3명의 자녀를 두고 있는 홀아비와 과부, 초등학력자, 자영업자 등이다. 관련단체의 조사에 의하면 빈민 노동자는 지난 1년 사이에 53만명으로 증가했다. 총인구의 3분의 1이 향후 빈민 노동자 계층으로 전락할지 모른다는 우려도 있다. 스위스의 경제중심 도시인 취리히. 이곳의 호수에는 오늘도 부호들의 호화 요트가 유유히 떠다니고 있지만 도시의 한 구석에 마련된 무료 급식소에는 행렬이 줄을 지어 번호가 호명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들에게 공급되는 급식은 자선단체들이 슈퍼마켓을 포함한 대형 유통업체들로부터 기증받은 것. 스위스에서 해마다 폐기되는 식품은 약 2억5천만㎏이며 이를 고스란히 빈민층에 나눠준다면 1인당 하루 1㎏에 해당한다. 자선단체들은 무료 급식소를 향후 2년 안으로 5개로 확대해 연간 300t으로 늘릴 것을 계획하고 있다. 스위스노동협회 관계자는 "이 나라는 빈곤이 없는 파라다이스라거나 낭만적인 국가가 결코 아니다"면서 국제적으로 스위스가 부국이라고 소문난 것은 맞는 말이지만 사실과 다른 측면도 있다"고 지적했다. 부의 스펙트럼에서 최상위 계층을 형성하는 주민들은 언론은 물론 일반 국민들로부터 늘 주목을 받고 있다. 그러나 실상을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세계적 부호들이 모여사는 취리히에는 호수를 끼고 고급 저택들이 줄지어 서있지만 여기에 누가 살고 있는지는 외부인으로서는 알기 어렵다. 부유층도 그들을 보는 사회의 껄끄러운 시선을 잘 안다. 그 때문에 부를 공공연히 드러내는 것을 삼가는 경향이 강하다. 취리히에 거주하는 부호들이 인접한 슈비츠와 추크 칸톤에서 세금 우대 조치를 취하자 이사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결코 차량 등록 번호를 바꾸지 않은 것이 단적인 실례. 관련법규상 2주내에 번호를 바꾸지 않으면 고액의 벌금을 물게 되지만 돈을 절약하기 위해 세금이 싼 지역으로 이사했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싶지는 않다는 이들의 속내라는 것. 이같은 실례는 최상위 계층들이 따가운 시선을 의식하면서도 부에 대한 집착은 여전히 강하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들은 현재의 생활에 몹시 만족하고 있으며 무엇인가를 바꿀 필요를 전혀 느끼고 있지 않다. 또한 투표율은 높아 스위스의 정치를 보수적인 방향으로 이끌어가고 있다. 그래서 스위스의 경제개혁이 부진하다는 한탄도 나오고 있다. 스위스의 상류층은 재산의 대물림에 별다른 제한이 없다. 세수의 권한이 상당부분 지방정부들에 이관돼 있어 체계적인 상속세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연방 산하의 칸톤(주) 정부들은 부호들을 불러들이기 위해 경쟁적으로 세율을 낮춘 결과, 스위스의 상속세는 다른 나라들에 비해 거의 알맹이가 결여된 상태. 이런 조세 특혜를 노려 상당수의 외국 부호들도 스위스행을 택하고 있다. 최근 발표된 조사에 의하면 스위스 고액 소득자 300명 가운데 절반이 외국인이다. 세계 1, 2위를 다투는 스웨덴 가구회사 이케아의 창업주인 잉그바르 캄프라드(78) , 포장재 생산업체인 테트라팍을 소유하고 있는 라우징스 가문, 하이네켄 맥주 그룹 의 전CEO인 알프레드 하이네켄의 딸 샤를렌 등이 스위스에 살고 있다. 영국의 팝 가수 필 콜린스, 록의 여제인 미국의 티나 터너, F1의 황제 미하 엘 슈마허, 독일의 테니스 황제 보리스 베커, 독일 축구의 전설 프란츠 베켄바우어 등이 스위스로 둥지를 옮긴 연예.스포츠계의 스타들. 그러나 좌파인 사민당이 최근 외국인에 대한 소득세 우대조치가 불공평하다는 국민 불만을 이유로 이를 폐지하는 것을 포함한 법률개정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 향후 변수로 등장할 전망이다. 사민당은 연방 정부 차원의 상속세도 도입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50만프랑 이상의 상속을 일단 대상으로 잡고 있다. 상속세는 탈세가 어려운데다 사회적 평등이라는 측면에서 여타 조세보다 효과가 강하다는 것이 사민당의 분석이다. 전문가들은 그러나 부유층에 대한 조세 강화가 결코 쉬운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들은 세금을 피하는 데는 도가 튼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유능한 변호사를 고용할 수 있고 여의치 않다고 판단되면 자본을 해외로 빼돌릴 수도 있다. (제네바=연합뉴스) 문정식 특파원 jsmoon@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