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1일부터 서울 광장동 쉐라톤 워커힐 호텔에서 열렸던 제15차 남북 장관급회담은 다툼과 갈등으로 점철됐던 여느 회담과는 다른 남북 당국회담의 미래 청사진을 보여준 장이었다는 평가다. 2000년부터 모두 14차례 열렸던 남북 장관급회담은 대부분 막판 합의를 이루기는 했지만 상호 신뢰 부족으로 인해 회담 내내 밀고 당기는 소모전으로 일관했다. 2001년 11월 9∼14일 금강산에서 열렸던 제6차 장관급회담에서는 막판 쟁점으로 부상한 경제협력추진위원회 제2차 회의 개최 장소를 합의하지 못해 끝내 합의를 보지 못하고 서로 등을 돌리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 적도 있다. 하지만 이번은 그야말로 180도 달라진 분위기를 절감할 수 있는 회담이었다. 우선 회담 형식부터 파격적이었다. 예년과 달리 사각형의 긴 회담용 탁자가 아닌 국제회의에서 주로 사용하는 원탁을 배치한 것이다. 기존 사각형 탁자에서 회담을 할 때는 마주보고 선 양측이 악수할 때도 멀기만 한 남북관계를 상징하 듯 허리를 한참 숙여야 했지만, 이번 회담에서는 원탁에서 그 것도 수석대표와 단장 좌석이 붙어 있어 앉아서도 `스킨십'을 할 수 있게 했다. 이는 양쪽을 편가르지 않고 회담 진행을 보다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한 의도라는 것이 우리 정부의 설명이다. 원탁으로는 변화는 `6.17 정동영-김정일 면담'시 정 수석대표가 김 위원장에게 회담 문화를 바꿀 것을 제안했고, 김 위원장이 "그 동안 5분 정도 덕담과 날씨, 모내기 얘기 등을 하고는 (본회담에서는) 주먹질하고 말씨름하고 소모적이었다. 적극 개선해 실질적인 협력 방안을 논의하자"며 적극 동조하고 나선 데 따른 것이다. 형식이 달라지자 회담 분위기와 내용도 달라졌다. 회담 기간 한 차례의 전체회의와 두 차례의 대표접촉 동안 양측은 시종일관 화기애애한 분위기속에서 각종 현안을 큰 이견없이 술술 풀어간 것으로 전해졌다. 그 동안 딱딱함으로 일관됐던 전체회의 기조발언도 서로가 적어온 것을 읽어내려가는 문어체의 낭독식이 아니라 대화체가 돼 친근감을 더해줬다. 남측 회담 대변인인 김천식 통일부 교류협력국장은 "정 수석대표와 권 단장이 바로 옆에 앉아 주거니 받거니 대화하다 보니 분위기도 상당히 좋았고 협의도 진지해졌다"고 회담 분위기를 전했다. 회담장이 아닌 22일 공동오찬장에서는 권 단장의 `깜짝제의'로 78명의 남북 대표단과 수행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서로 섞어 앉아 식사를 하는 진풍경도 연출됐다. 분위기가 이렇다 보니 내용면에서도 상당한 성과를 거둬 우리 정부는 22일 첫 전체회의 직후 이례적으로 남측 회담 대변인의 상세한 브리핑을 곁들인 북측의 기조발언 일부를 포함한 우리측 기조발언문 요지를 취재진에게 배포하기까지 했다. 이 같이 달라진 회담문화로 인해 북측 대표단은 21일 입국시 일부 단체의 반북시위와 22일 일부 탈북자들의 시위로 남양주 영화종합촬영소 참관이 좌절돼 얼굴을 붉혔지만 회담장에서는 이에 대한 불만이나 항의가 전혀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게다가 북측 대표단은 폴라 도브리안스키 미 국무부 차관이 입국 하루 전날 북한을 `폭정의 전초기지'라고 또 다시 규정한 데 대해서도 아무런 언급이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적어도 남북대화에서만은 양측 모두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이어 가려는 모습이 역력했다. 이런 분위기는 회담의 피날레인 공동보도문 발표까지 이어져 양측은 밤샘회담을 하며 방문측이 떠나는 아침까지 줄다리기를 했던 관례를 깨고 처음으로 예정시간에 맞춰 이날 오후 합의문에 전격 서명했다. 그 것도 몇 명의 양측 풀기자만을 참석시킨 채 종결회담을 갖고 회담을 마무리 했던 것과 달리 종결회의 직후 정 수석대표와 권 단장이 직접 프레스센터를 찾아 단상위에 나란히 선 채 공동발표문을 각각 읽어내려가는 역사적인 장면도 연출됐다. 게다가 과거 장관급회담 공동보도문이 주로 1장, 많아야 2장이던 것이 이번 회담에서는 3장에 달했던 것은 이번 회담이 과거보다 짧은 협의시간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많은 현안들이 속전속결로 합의됐는 지를 방증하는 것이다. 비록 당초 이날 오후 6시 30분께 공동합의문을 발표할 것이라고 예고까지 했다가 문안조율 문제로 2시간 30분가량 늦어지긴 했지만 이는 달라진 회담 분위기에 별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정 수석대표는 합의 뒤 공동보도문을 낭독하기 앞서 "과거 이념과 대결의 질곡속에서 상실하기 일쑤였던 남북의 민족적 실리를 잃지 않고 역량을 키워가자는 데 초점을 두고 12개항에 합의했다"며 감격해했다. 그러나 남북 당국간의 이 같이 달라진 회담 문화는 향후 남북관계 기상도가 `아주 맑음'을 예고하는 것이라는 평가가 주를 이루고 있지만 `6.17 정-김 면담'의 후광효과에 의한 것이라는 일부 분석도 있어 회담문화의 변화를 판단하려면 향후 회담을 지켜봐야 한다는 일부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한편 회담장을 찾았던 이종석 NSC(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차장은 이날 새벽 기자들과 만나 북핵 6자회담과 관련, "7월 복귀 가능성에 대한 북한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것보다는 진정성이 있게 몰고 가야 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하고 "뜨거운 여름이 될 것"이라고 의미심장한 말을 던져 눈길을 끌기도 했다. (서울=연합뉴스) 이상헌 기자 honeybee@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