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아차 광주공장 노조의 채용비리 사건을 계기로일부 대기업 노조들의 부도덕한 행태가 여론의 도마 위에 올려져 혹독한 비판을 받고 있다. 그 반향으로 일개 기업노조의 비리를 단죄하고 그 부도덕성을 성토하는 선에서 이번 사건을 봉합해서는 안 된다는 경계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차제에 기아차 노조의 문제를 엄정히 바로잡는 것은 물론 일부 대기업 노조의 권위적이고 귀족적인 행태와 노동계 전반의 불합리한 관행을 일거에 척결할 수 있도록 범사회적 논의와 제도적 장치 모색이 뒤따라야 한다는 지적이 힘을 얻고 있다. 워낙 사안 자체가 심각하다 보니 당장에는 대표적 강성노조라는 기아차노조도 거의 `백기투항'과 같은 저자세로 몸을 낮추고 있으며, 노동계도 그 진의가 어디에 있든지 일단은 기아차노조를 비판하는 모양새를 갖춰가는 분위기다. 하지만 검찰 수사가 언젠가 일단락되고 이번 사건이 어느 정도 세인들의 뇌리에서 잊혀진 이후에도 기아차노조나 노동계가 지금과 같은 저자세로 일관할 지는 미지수다. 사건 초기 일찌감치 총사퇴를 선언한 것에서 읽을 수 있듯이 현 기아차노조 집행부는 이번 사건으로 "과연 회생할 수 있을까"라는 우려가 나올 정도로 큰 타격을 받았다. 또 현 집행부 아래서 `취업 장사'의 치부가 드러난 만큼 차기 집행부는 조금이나마 온건 노선의 합리적 성향을 견지할 것이라는 기대섞인 전망도 없지 않다. 그러나 이번 사건을 시금석으로 삼아 노사 모두 과거와 결연히 단절하는 `환골탈태'의 의식 전환을 수행해야 한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아울러 그같은 의식 전환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제도적 틀을 시급히 마련하지 않는 한 머지않아 구태로 회귀할 가능성이 높다고 업계 노무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실제로 이번 사건이 터진 이후 기아차노조 홈페이지에 올라온 글들을 꼼꼼히 살펴 보면 그같은 우려가 `기우'가 아님을 금방 알 수 있다. 물론 광주공장 노조와 본부노조를 싸잡아 비판하는 글들이 훨씬 더 많았지만 게중에는 노조를 노골적으로 감싸고 도는 글도 적지 않았다. 일부이긴 하지만 어떤 글은 취업을 미끼로 돈을 챙긴 노조간부의 파렴치한 행위를 놓고, 우리 사회 전반의 도덕적 기준에 비춰 크게 문제 될 것이 없다는 식의 황당한 주장을 늘어 놓기도 했다. 이번 사태가 잠잠해지기 만을 기다리는 초강성 세력이 기아차노조 내부에 엄존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는 증거인 셈이다. 또 이번 사건의 원인 제공자로 지목되고 있는 기아차 단체협약상의 `문제조항'들만 해도 그렇다. 이번 사건을 통해 대부분 확인됐듯이 기아차의 현행 단협에는 경영 전반을 압박하는 이른바 `독소조항'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 회사측 주장이다. 기아차 단협에는 회사가 경영상의 판단에 따라 ▲공장 이전 및 통폐합 ▲사업장간 차종 이관 ▲영업지점 이전 및 통폐합 ▲인력 전환 배치 ▲신차종.신기술.신기계도입을 통한 작업환경 개선 ▲시간당 생산대수(UPH) 조정 ▲차종 단산 및 신차종 투입 등을 추진하려 해도 노조의 동의 없이는 불가능하도록 돼 있다. 또 ▲휴일 특근이나 ▲작업장내 안전 사항에 대해서도 노조와 사전 협의해야 하고, 노조원 징계시에도 노사 동수로 구성된 사실조사위원회에서 잘못된 부분에 대해조목조목 합의가 이뤄져야 비로소 징계위원회 소집이 가능해진다. 한마디로 생산활동과 경영 전반에 걸쳐 노조의 동의 없이 회사가 독자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사항이 거의 없다시피 한 실정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사사건건 회사가 노조에 발목을 잡혀 끌려갈 수밖에 없고그 결과 기아차같은 제조업체의 경우 처음부터 생산성 향상과 성장에 한계가 있다는것이 노무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실상이 이와 같은데도 현재 노조가 여론의 집중포화를 맞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단협상의 문제조항에 당장 손을 대기는 불가능한 것이 현실이다. 단체협약을 고치는 노사교섭이 2년 주기로 이뤄지기 때문에 작년 7월 타결된 현행 기아차 단협을 개정하려면 1년 반이나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기아차 경영진은 멀리 보면 내년 하반기까지 스스로 문제가 많다고인식하고 있는 현행 단협을 갖고 초강성 노조를 상대해야 하는 셈이다. 기아차가 이번 사태가 불거진 이후 거의 함구로 일관하며 노조 문제에 매우 조심스럽게 대응하고 있는 이유도 바로 이같은 상황인식과 무관치 않다. 국가 경제에서 차지하는 자동차산업의 높은 비중을 고려하더라도 업계 간판격인현대차와 기아차의 전투적 노사관계를 그대로 방치할 수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자동차 업계 관계자는 "세계 자동차시장에서 현대차와 기아차는 단기간의 빠른성장으로 크게 주목받고 있다"면서 "그러나 외국 사람들이 더 인상적으로 보는 부분은 양사가 그처럼 힘이 센 노조를 갖고 있으면서도 그만한 성과를 이뤄냈다는 점"이라고 전했다. 단순한 칭찬이 아니라 이면에 냉소를 깔고 있는 듯한 시각이지만 미국, 일본 등자동차선진국에서 국내 자동차업계의 노사관계를 얼마나 소모적인 것으로 보고 있는지를 짐작하기에는 충분한 사례다. 실제로 작년 11월 대한상공회의소가 발표한 '자동차산업 노사관계 국제비교와시사점'이란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2003년 노사분규로 인한 국내 제조업의 생산 및수출차질액이 각각 2조4천972억원, 10억5천300만달러로 추정됐는데 이중 완성차업계가 차지하는 부분이 생산차질 1조9천530억원(78.2%), 수출차질 8억9천200만달러(84.7%)에 달했다. 그만큼 현대.기아차 등 국내 완성차업계의 노사관계가 대립적이고 소모적이라는 의미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현대차가 추격의 타깃으로 정한 일본 도요타의 경우 회사 경영실적이 기록적으로 좋았던 지난해에도 노조가 국민경제와 산업 전반에 미칠 영향을 감안해 스스로 임금을 동결할 만큼 노사 관계가 안정돼 있다. 현대차는 차량의 품질과 성능을 아무리 개선해도 취약한 노사관계 때문에 도저히 도요타를 따라갈 수 없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자동차업계 노무전문가는 "현대차나 기아차가 도요타 정도로 합리적이고 생산적인 노조를 갖고 있다면 정말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놀라운 성장을 이뤄낼수 있을 것"이라면서 "반대로 현재와 같은 노사관행을 그대로 안고 가는 한 세계적 자동차메이커 도약은 영원히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고 지적했다. (서울=연합뉴스) 한기천기자 cheon@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