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8월15일 오전 10시23분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거행된 광복절 29주년 기념식장에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을 저격하려다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 여사를 절명케 한 저격범 문세광(文世光)은 현장에서 체포돼 128일만인 12월20일 서울 구치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러나 동일한 사건에 대한 수사임에도 불구하고 한일 양국의 결론은 상당히 달랐다. 한국 측은 이 사건이 조총련, 북한과의 연계를 확신한 반면 일본 측은 문세광의단독범행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사건 직후 당시 김일두(金一斗) 서울지검장을 본부장으로 한 한국측 특별수사본부의 수사결과는 이렇다. 저격범 문세광(당시 23)이 북한공작원으로부터 박 대통령을 암살하라는 지령을받고 8월6일 오전 1시 KAL기 편으로 김포공항으로 입국, 범행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문세광이 1972년 9월5일께 조총련에 포섭돼 반정부 활동을 펴오다가 1974년 5월5일 북한 공작선 겸 무역선인 만경봉호에서 공작지도원으로부터제29회 광복절 기념식에서 박대통령을 저격하라는 지령을 받고 서울에 잠입, 범행을저질렀다는 게 당시 수사본부의 설명이다. 범행을 위해 일본인 요시이 유키오(吉井行雄)라는 이름의 위조여권을 사용됐고일본에서 훔친 권총과 탄알을 훔쳐 트랜지스터 라디오 속에 감춰들여왔으며, 그 배후는 50세 가량의 머리가 벗겨지고 마른 체격의 이름을 알 수 없는 지도원과 조총련오사카(大阪) 이쿠노(生野) 서(西) 지부 정치부장 김호용(金浩龍.47) 등 2명이라고수사본부는 밝히고 있다. 문세광과 김호용의 관계에 대해 1972년 9월3일 오사카 소재 패스티벌홀에서 개최된 단합대회 때 처음 만나 알게 된 뒤 김호용이 매월 평균 2차례씩 약 1년간에 걸쳐 문세광의 집을 드나들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는 것. 특히 1974년 정월에는 한덕수 조총련 의장의 `혁명을 위해 일층 노력해주도록'이라는 말과 함께 정초 선물로 인삼주와 과실주를 김호용이 문세광에게 전했다고 당시 수사본부는 발표한 바 있다. 문세광의 범행동기에 대해 수사본부는 문세광이 김호용을 접촉하는 과정에서 북한 및 조총련에서 발간한 각종 팜플렛과 공산서적에 현혹돼 공산사상에 물들었으며남한내에서 인민민주주의 혁명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대통령을 암살, 이를인민봉기의 기폭제로 삼아야 한다는 김호용의 선동에 고무돼 대통령 저격을 결의하게 됐다고 밝히고 있다. 김호용은 또 1973년 1월과 1974년 7월24일 각각 일화 50만엔과 80만엔의 거사자금을 문세광에게 건넸다는 내용이 당시 수사본부의 수사발표에 포함돼 있다. 수사본부는 사건발생 10일 만인 24일 오전 문세광을 반공법, 국가보안법, 내란목적살인, 일반살인, 살인미수, 출입국관리법, 총포화약단속법, 여권법, 문서위조등 13가지 죄목으로 서울지검에 구속송치했으며 김호용과 요시이 유키오와 요시이미키코(吉井美喜子) 등 3명도 공동정범으로 입건, 기소중지의견을 붙여 송치했다. 그러나 일본측의 수사 결과는 여러가지 면에서 다른 시각을 보이고 있다. 일본 측은 사건 직후 오사카 경찰청 산하에 특별수사본부를 차리고 문세광에 대한 사형 집행이 이뤄진 지 닷새후인 12월25일까지 132일간 수사를 벌였다. 일본 측의 수사 결과 개요는 이렇다. 문세광은 1973년 9월께 한국내에서 혁명을 일으키기 위해 박 대통령 암살을 결의하고 범행을 계획, 실행했다는 게 핵심이다. 문세광은 이를 위해 지인인 요시이 미키코를 만나 그녀의 남편인 요시이 유키오의 호적등본 주민표를 받아 일반 여권을 교부받아 1973년 11월 19일 요시이 미키코와 함께 홍콩으로 건너가기도 했고, 1974년 2월12일부터 3월11일까지 동경의 아가후도 병원에 입원해 거기에서 범행을 위해 한국행을 결심하고 다시 요시이 미키코의협력을 받아 6월말 부정여권을 얻었다는 것. 그 후 문세광은 또 범행에 사용할 무기를 얻기위해 오사카시 남구 다카쓰 파출소에 침입, 권총 두자루와 실탄 10발을 훔쳐 8월6일 오사카 공항에서 서울로 건너가일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조총련→문세광'으로 이어지는 핵심고리인 김호용과 문세광과의관계에 대해 `김이 문의 저격행동을 사전지휘했다는 뚜렷한 증거가 없다'는 게 일본측의 결론이다. 분명한 연계설을 주장하는 한국 측과 명확하게 다른 시각이다. 특히 일본은 문세광의 저격은 `과실살인'이라는 입장을 취했다. 실제, 8월 29일외무부 정보보고에 따르면 일본 경시청은 육영수 여사의 저격은 '과실살인'임에도한국 수사당국이 짜맞추기 수사를 하고 무리하게 법을 적용하고 있다며 정부의 수사발표에 불만을 드러냈다. 나아가 일본 측은 문세광이 김호용으로부터 한덕수 조총련 의장의 선물을 받았다는 한국 측의 주장과는 달리 "1974년 정월 문세광은 김호용으로부터 과실주와 조총련 중앙본부 한덕수 의장 명의의 연하장을 받았다"고 밝히고 있다. 문세광의 거사 비용과 관련해서도 일본 측은 "문세광이 8월1일 자신의 처에게 15만엔의 저금통장을 주고 약 60만엔을 갖고 한국으로 건너간 것으로 보인다"고 수사결과에 명시해 문세광이 `스스로' 마련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범행동기에 대해서도 "문세광이 유서에서 `김대중 선생사건, 유엔총회 등을 계기로 1인 독재를 타도하는 것이 한국혁명에 가장 중요한 일이다. .., 나는 죽음이냐 승리냐의 혁명전쟁에 나선다'고 밝혔으며 그 자신이 혁명의 기폭제 역할을 꿈꾸었다"고 일본측은 풀이했다. 범행 결심과 실행을 문세광 개인에게 맞추고 있는 것이다. 이런 때문인지 일본 측은 한국측의 강한 압박에도 불구하고 김호용에 대해서는 강제수사를 하지 않았으며 요시이 미키코에 대해서는 여권법 위반혐의로 구속했다가얼마 있지 않아 보석으로 풀어줬다. 한일간의 이런 견해차는 당시 박정희 정권을 격앙시켜, 한일 양국간 `단교 위협'이라는 극단적 상황을 초래했다. (서울=연합뉴스) 인교준 기자 kjihn@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