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多産정치 펼칠때..박효종 서울대 교수ㆍ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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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효종 < 서울대 교수ㆍ정치학 >
광복 60주년이 되는 을유년 새해의 화두는 단연 희망이다.
그것은 그만큼 우리가 희망을 목말라해 왔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지난해의 정치는 희망만 빼고 모든 재앙을 방출한 '판도라 상자'였다.
말싸움 몸싸움 기싸움 패싸움 등 갖가지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정작 무엇을 위해 싸웠는지 알 수 없는 불임의 정치였다.
이제 정치는 영락없이 벌거벗은 나무다.
자연의 나목은 '필사즉생(必死則生)'의 아름다움을 풍겨주지만, 정치의 나목은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비참하다.
생각해 보면 토론민주주의가 작년처럼 꽃핀 적도 없었다.
국정의 아젠다를 토론과 공론의 대상으로 접근하고 중지를 모아 결론을 내자는 발상은 참신한 심의민주주의 비전이다.
그래서 경제가 위기냐 아니냐 하는 문제로 갑론을박했고 성장이냐 분배냐를 가지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
하지만 '당동벌이(黨同伐異)' 외에 결론은 있는가.
진보는 보수와,386은 5060과 패싸움을 벌였을 뿐,지혜가 넘쳐흐른 것도,관용이 많아진 것도 아니다.
사공이 많아 강으로 가지 않고 산으로 올라간 배가 우리 토론정치다.
소수자와 약자로서 서러움에 겨웠던 노무현 대통령은 탄핵에서 살아 돌아왔고 과반수 여당을 갖게 되어 펴보고 싶은 포부가 많았다.
포부가 많은 것은 아젠다가 많았다는 말이다.
사회의 주류도 바꾸고 반칙을 일삼아온 기득권층도 해체하며 약자를 보살피겠다는 거대한 꿈이 있었다.
행정수도를 옮겨 국토 균형발전도 추구하며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도 달성하겠다는 중장기 꿈,강남불패신화를 깨겠다는 단기적 꿈도 있었다.
또 성매매를 원천적으로 금지하는 도덕적 국가,자주국방을 추구하는 자주국가,동북아 허브국가의 꿈도 빼놓을 수 없다.
그뿐만이 아니다.
친일파 척결 등,과거사를 정리함으로써 민족정기를 바로잡겠다는 꿈,사학재단의 비리를 근절하고 언론사의 개혁을 주도하며 국가보안법을 칼집에 넣어 박물관에 보내는 꿈도 꾸었다.
그렇다면 백성들의 살림살이는 나아졌는가.
외교안보는 튼튼해졌는가.
자주국방은 전망이 섰는가.
정부가 5%의 경제성장률을 포기했고 청년실업이 7%를 웃돌고 있다면,또 한국이 어느 때보다 외로운 나라가 되었다면,꿈은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다.
미완성교향곡은 아름답지만 미완성의 꿈은 아름답지 못하고 오직 남가일몽(南柯一夢)일 터이다.
왜 아젠다과잉,개혁과잉,이념과잉,토론과잉이 되었을까.
의욕이 넘쳐서인가,아니면 이상이 넘쳐서인가.
과식보다는 소식이 낫고 과욕보다 절제가 나은 것처럼,"넘치면 모자라느니만 못하다"는 말이 실감난다.
개혁 아젠다에는 실사구시와 실용주의보다는 이상주의와 근본주의가 배어 있었다.
5년 안에 모든 걸 헐고 전혀 새로운 집을 짓겠다니,모래사장의 '두꺼비집'도 아닌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 일인가.
돌을 하나씩 얹어 탑을 쌓고,나무를 하나씩 심어 숲을 만들겠다는 생각을 하기보다 돌도 놓지 않고 탑돌이를 하고 나무도 심지 않은 채 숲을 만들겠다고 나선 형국이었다.
또 근본을 바꾸려는 근본주의자의 딜레마도 고스란히 느껴진다.
근본을 바꾸려니,산을 옮기는 것처럼 좀 힘이 많이 드는가.
결국 힘만 들고 보람이 있을 수 없었다.
정치가 보람이 없으니,정치인에게 소금을 뿌리고 솥단지를 내던지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이다.
우리는 언제까지 정치에 대한 절망과 저주가 팽배한 '눈물의 계곡'에서 살아야 하나.
하지만 진흙 속에서도 연꽃이 피고 초생달이 되었으면 보름달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이치를 알아야 한다.
산꼭대기에 힘들여 올린 돌이 제 무게로 밑으로 내려올 때에도 뛰어내려가 의연하게 기다리는 카뮈의 '시지프스'처럼, 우리는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찾아야 한다.
소금을 뿌리기보다 꽃다발을 던져주는 정치, 저주를 퍼붓기보다 축복을 해주는 정치를 만들어 가야 한다.
그것은 벌거벗은 나무에 새순을 돋게 하고 '지는 해'를 '뜨는 해'로 만드는 일일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우리의 실낱같은 기대가 헛되지 않아 정부로부터 '민생' '통합' '화해' '껴안기' 등의 반가운 말들이 들려온다.
이것은 분명 정치패러다임을 바꾸겠다는 희망의 조짐이다.
그러나 우리 정치가 '속알머리'는 바꾸지 않고 '주변머리'만 바꾼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영화예고편을 보고 잔뜩 부푼 기대를 가지고 있던 관객들이 정작 영화를 보고 속았다고 외치는 상황이 벌어져서는 곤란하다.
망의 정치는 감동의 정치여야 한다.
운동선수들이 경기가 끝나고 상대방과 유니폼을 바꾸어 입을 때 감동적이다.
이처럼 노 대통령도 '건강한 긴장관계'를 형성해왔던 조선·동아일보와 신년대담을 나눈다면 감동적 이벤트가 되지 않을까.
여당의 386 국회의원들이 국가보안법을 지키자고 외치고 한나라당 의원들이 국가보안법을 폐지하자고 주장한다면 국민은 어리둥절하면서도 감동할 것이다.
이것들은 '발칙한 상상'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발칙한 상상'이 현실이 되지 않고 어떻게감동을 줄 수 있을 것인가.
충청권 국회의원들이 헌법재판소의 행정수도이전 위헌결정을 지지하는 공동성명을 낸다면 감동정치의 극치가 될 것이다.
노사모가 노 대통령을 비판하고 박사모가 박근혜 대표를 비판한다면,사자와 양이 한곳에 누워 있는 모습을 보는 것처럼,감동이 물결칠 것이다.
희망의 정치는 큰 것보다 작은 것을 추구하는 정치다.
작은 고추가 맵고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하지 않는가.
뜬구름 잡는 것 같은 '통큰 정치'를 말하기보다 작은 것을 보살피는 실사구시의 '좁쌀정치'를 하겠다고 나선다면,삶에 지친 사람들이 신뢰를 가질 것이다.
나라를 통째로 바꾸겠다거나,6백년 수도를 '천도'하겠다고 말하지 말라.자주국방을 하겠다고 큰소리 치지도 말라.
또 '강남불패'를 '강남필패'로 바꾸겠다고 장담하기보다 서울은 서울대로 지방은 지방대로 발전시키겠다고 약속하라.이제까지의 역사를 반칙과 특권의 역사라고 하지 말고 잘못된 것만 바로잡겠다고 선언해야 한다.
또 그 동안 '팩팩'했던 대통령의 통치스타일을 바꾸겠다고 말한다면 작지만 아름다운 약속이 될 것이다.
그런가 하면 희망의 정치는 강함과 딱딱함보다는 부드러움을 추구해야 한다.
정치는 'Ms. Strong'이 아니라 'Mr. Beauty'를 닮아야 하지 않을까.
혹시 'Mr. Beauty'가 되는 것이 너무 부담스럽다면 적어도 'Mr. Soft'는 되어야 한다.
젊은이와 늙은이를 나누고 강자와 약자를 구분하며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정치는 강하고 딱딱한 정치의 전형이다.
그런 정치는 한을 남기고 골을 깊게 한다.
진보든 보수든 모든 걸 감싸안으면 통합과 화합의 '소프트 정치'가 된다.
어렵고 가난한 사람들로 하여금 한을 품게 하는 정치 못지 않게 부자들을 죄인시하고 기업가들에게 한을 품게 만드는 정치도 '스트롱 정치'다.
눈물은 빈자와 약자만 흘리는 것이 아니라 부자와 강자도 흘리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희망의 정치는 정치인 '그들만의 잔치'가 아니다.
국민을 주인이라기보다 들러리로 생각하는 한 희망의 정치는 불가능하다.
국민이 물이라면 정치는 그 위에 떠있는 배가 아닐까.
국민이 삶에 지쳐 있는데 개혁 성향이 부족하다고 다그치며 사람들이 배가 고프다고 아우성을 치고 있는데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고 강변한다면 가학적 정치일 뿐 국리민복의 정치는 아니다.
국민은 바람이 불면 눕는 풀잎과 같은 수동적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구호정치'보다 '민생정치'가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희망의 정치는 얼마나 정성스럽게 국민들의 눈물을 닦아주었는가,국민의 가려운 곳을 긁어 주었는가로 평가받는 것이지,얼마나 큰 꿈을 꾸었나,얼마나 로드맵을 잘 짰나로 평가받는 것은 아니다.
그 동안 한국정치는 '알리바이'의 정치였다.
항상 '미션 임파서블'만을 외쳐왔다.
국민이 부르면 달려가겠다고 공언하면서도 정작 국민들이 필요로 하는 곳에서는 부재했다.
책임을 물을 때는 발뺌을 하기 일쑤였다.
그것이 한국정치의 속물근성이다.
우리는 정치에서 기적을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기적은 바라지 않아도 감동을 기대하고 희망을 노래할 권리는 있다.
부디 을유년의 정치가 생각은 많이 하되 말은 적게 하고 꿈은 적게 꾸되 실천은 확실한, 희망과 감동의 정치로 자리매김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