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관계를 거부한 아내를 강제로 추행한남편에 대해 법원이 형법상 강제추행치상죄를 인정한 것은 배우자가 다른 한쪽의 성행위 요구에 대해 응해줄 의무는 있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성적 결정권까지 포기한것은 아니라는 진일보한 판단이 들어 있다.

▲ 아내의 성적 자기결정권 인정 =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는 "결혼한 부부가 배우자의 성관계 요구에 응할 의무는 있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성적 결정권까지포기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며 성관계 요구에 응하지 않는 배우자에 대해 성관계를강제할 수도 없다"며 판결 요지를 설명했다.

부부간 성적 결정권과 관련, 지난 69년 아내를 강간한 혐의로 남편이 기소된 전례는 있지만 이듬해 대법원은 "사건 당시 실질적인 부부관계가 있었다고 판단되면남편이 처를 강제로 간음했다고 해도 강간죄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판시, 부부간 강간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즉 별거나 이혼 등으로 정상적인 부부생활을 지속하지 않았다면 몰라도 정상적인 부부인 경우엔 부부간 강간죄는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 당시 대법원의 판단이었고 유사 사례로 남편이 기소된 전례도 찾을 수 없었다.

이번 사건에서는 부부간 갈등을 겪고 아내가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 두 사람은 한 집에 동거하는 정상적인 부부였고 법원이 이런 정상적인 부부 사이에서도 강제추행이 성립한다고 판단, 아내의 결정권을 적극 인정한 것이다.

법원은 그러나 "부부간의 단순한 신체접촉까지 강제추행죄가 성립할 수 있다는뜻은 아니다"고 밝혔다.

▲ 여성계 입장 = 한국성폭력상담소는 "우리 사회에는 여성을 남편의 재산으로보고 혼인시 성관계 의무가 있다고 여겨왔고 부부간 일은 법이 개입할 영역이 아니라고 일축해 왔다"며 "이번 판결은 여성인권이 유린돼 온 법 관행을 바로잡는 시금석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한국여성의전화연합은 "남편들이 아내를 구타하는 등 폭행뒤 행동 중 12~13%가성적 가해인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며 "부부간 강간, 데이트 강간 등의 문제를 법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됐다는 점에서 의미있다"고 환영했다.

▲ 외국 사례 = 아내에 대한 남편의 강간이나 강제추행을 인정하는 것은 세계적인 추세. 미국은 84년 결혼한 여성에게도 성적 자기 결정권을 인정한 첫 판결이 나왔는데당시 법원은 "혼인 증명서가 남편이 아내를 강간할 수 있는 자격으로 파악될 수 없으며 기혼 여성도 미혼 여성과 같이 자신의 신체를 통제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고 판시했다.

영국에서도 94년 부부 강간을 처음 인정했고, 독일에서도 97년 형법을 개정하면서 법률상 아내가 강간죄의 대상이 될 수 있도록 했다.
일본의 경우 우리 나라처럼명문화하지 않았지만 혼인이 실질적으로 파탄난 경우 아내에 대한 남편의 강간을 인정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연합뉴스) 정성호.윤종석 기자 sisyphe@yna.co.kr banana@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