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때 일본 해상보안청(현 해상자위대)소속 소해대(掃海隊)가 미군의 요청으로 참전했다는 일본인 참전자의 증언이 나왔다.

오가 료헤이(大賀良平) 전 해상자위대 막료장은 지난 1일 아사히(朝日) 신문과 회견에서 자신이 6.25전쟁 시 시모노세키(下關) 해상보안청의 소해대 지휘관이었다고 소개하고 "1950년 개전 직후 일본의 소해대(掃海隊)가 편성됐는데 6척의 소해정을 이끌고 미군 해군과 함께 한국 서해에 파견돼 2개월 가까이 작전에 참가했다"고 말했다.

1950년 7월 경찰예비대(현 육상자위대) 창설 직후 경비과장 겸 조사과장이었던 고토다 마사하루(後藤田正晴) 전 부총리도 "해상보안청 소해정이 인천상륙작전에 끌려가 사상자가 발생한 것을 알고 있었다"고 밝혔다고 아사히신문이 전했다.

지금까지 일본군의 6.25 참전에 대해서는 일부 외신 보도, 북한측의 일방적 주장 등이 있었으나 일본 정부는 묵묵부답으로 대해 왔다. 이번 증언으로 일본군 6.25참전은 역사적 사실로 확인된 셈이다.

일본군 6.25 참전은 당장 북한ㆍ일본 수교협상에 새로운 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지난 2002년 북ㆍ일 정상회담에서 북한은 일본의 식민통치에 대한 보상문제에 대해 일단락지었을 뿐 그 동안 자신들이 줄기차게 요구해 왔던 '전후(戰後)보상'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전후보상이란 광복 이후 반세기 넘게 지속돼 온 일본의 대북 적대정책으로 인한 피해도 보상하라는 것이다.

북한 당국은 일본의 적대정책의 대표적 사례로 일본군인의 6.25 참전을 거론해 왔다.

그러나 일본측도 인정할 만한 객관적인 증거를 확보하지 못해 전후보상 문제는 꺼내보지도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이 6.25 전쟁 때 후방병참기지 역할을 했고 일본군인들이 미군에 배속돼 한반도 전선에서 직접 전투임무를 수행했다는 주장은 그 동안 몇 차례 제기됐다.

지난 50년 7월 27일 로이터 통신은 "50년 7월에는 벌써 일본인 군인들의 참전자 수가 2만 5천여명에 이르렀다"고 보도했다.

50년 7월 4일 오산전투에서 궤멸된 미제 24사단 21연대 스미스 특공대 사망자 속에 30여명의 일본인 장교들이 섞여 있었다는 설(說)도 나왔다.

일본인 군인이 북한측에 포로로 잡혔다는 신빙성 있는 자료도 있다.

미 육군성 군사감실(軍史監室)에서 펴낸 <6.25 유엔군戰史> 제2집 「정전회담과 전선」(TRUCE CAMP AND FIGHTING FRONT)의 자료집에 일본인 포로 1명이 정전과 함께 송환된 사실이 기록돼 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일본군인들이 미군의 세균전 및 화학전을 적극 도왔다는 북측 주장.

지난 2000년 6월 평양방송은 6.25전쟁 발발 50주년에 즈음해 "미제의 요구에 따라 이시히로, 와카카즈 이치로, 기다노 세이조 등 일본의 세균전 전범자놈들은 ... 사이타마(埼玉)현과 가나가와(神奈川)현 등의 세균무기 연구소에서 세균무기를 연구해 미군에게 넘겨 주었다"고 세균전 참여 일본인의 인명과 지명을 구체적으로 거명하기도 했다.

세균무기연구소는 미 육군 `생물화학 방사선무기 연구본부'의 부속기관으로서 6.25전쟁 초기에는 유엔군 `제406 진료소 수혈부'로, 나중에는 미군 `제406부대' 등의위장된 이름으로 불렸다고 이 방송은 덧붙였다.

북ㆍ일 정상회담 이후 잦아들긴 했지만 그 전 북한에서는 일본측에 6.25참전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할 것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종종 흘러 나왔었다. 여기에는 전후 보상을 받아내겠다는 의도 외에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참전사실을 밝히고 사과하는 것은 과거 `범죄'를 또 다시 감행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는 것, 즉 대북 적대정책을 펴거나 대북 침략전쟁에 뛰어들지 말라는 것이다.

이번 참전자 증언이 앞으로 북ㆍ일 수교 협상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관심거리다.

(서울=연합뉴스) 정일용 기자 ciy@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