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이나 문학전집을 장식용으로 애용하던 시절이 있었다. 거실이나 사무실 벽에 좍 꽂힌 책이 주인의 격을 높인다는 생각에서였을까. 심지어 내용물 없이 껍데기만 놓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졌다. 요즘 그런 일은 없다. 대신 집과 사무실 할 것 없이 TV와 장식장 혹은 컴퓨터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전집류에 포함되던 고전을 읽는 사람도 그만큼 줄어든 듯하다. 유명한 작품도 책을 통해 내용을 아는 경우는 적어 보인다. 영화나 비디오 만화 등으로 만나는 탓이다. 그러나 책은 영상물과 다르다. 영상물은 특성상 원작의 틀만 차용하는 수가 많고 원작에 충실하다고 해도 눈에 보이지 않는 자간과 행간의 의미를 담아내기는 불가능하다. '영화는 보여주고 책은 상상하게 한다'고 하거니와 제 아무리 잘 만든 영화도 읽다가 덮어두거나 밑줄을 그어뒀다 다시 들춰보면서 단어와 문장에 포함된 의미를 되새김질할 수 있는 책의 영역을 대신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고전 문학작품은 오랜 세월 동안 그 가치가 검증된 선인들의 노작이다. '햄릿' 속 폴로니우스의 아들에 대한 조언은 지금도 모든 사람에게 유용하고,'파우스트'의 방황 또한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괴로운 수많은 이들을 위로한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이 1백권에 이르렀다는 소식이다. 98년 첫권 '변신 이야기'(오비디우스)를 내놓은 지 5년여 만의 일이다. 1백번은 '춘향전'(송성욱 편역),99번은 '맥베스'(셰익스피어).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은 '오늘의 독자에겐 오늘의 번역이 필요하다'는 전제 아래 양장본 세트가 아닌 단행본으로 기획된 이래 그간 '동물농장' '허클베리핀의 모험' '설국' '황제를 위하여' 등 동서양과 국내 작품을 망라해왔다. 문학의 시대가 지나갔다는 지금 문학전집을 만드는 일은 어쩌면 무모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요약이나 중역을 피하고 원본을 오늘의 문법에 맞게 충실하게 번역해낸 고전은 자극과 폭력으로 얼룩진 시대물에서 느끼기 힘든 감동과 삶의 지혜를 준다. 20권이고 30권이고 세트로 사야 했던 예전과 달리 낱권으로 파니 마음에 드는 것만이라도 사서 곁에 두고 자주 펼쳐보면 그 무엇에서도 얻기 어려운 위안과 깨달음을 갖게 되지 않을까. 박성희 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