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이 당초 이라크 주권 이양 데드라인으로 제시됐던 올 6월30일 이전 총선 실시가 불가능하다는 판단을내렸다. 이로써 불확실성으로 둘러싸였던 이라크의 정치일정이 중대고비를 맞게 됐다. 아난 총장의 판단은 이라크가 주권국가로 재탄생하는 과정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조기총선 무산= 아난 총장의 판단은 외견상으로는 올 6월 말 이전 총선실시 불가입장을 고수하며 이라크내 최대종파인 시아파와 대립했던 미국측의 손을 들어 준 것으로 보인다. 시아파의 최고 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알-시스타니는 국민의 직접선거에 의해 선출되지 않은 임시정부에 주권을 넘기는 것은 법적 타당성을 결여하는 것이라며 주권이양전 총선을 요구해 왔다. 그러나 미국은 치안불안과 투표인 명부 미비 등 현실적 여건을 들어 올 6월 말로 못박은 주권이양 예정일 이전의 총선은 어렵다는 입장을 고수해 시아파와 대립했다. 결국 지난 8월 바그다드 유엔사무소 폭탄테러 이후 이라크 문제에서 손을 뗐던유엔이 중재자로 나서 조기총선 실시 가능성에 대한 조사를 벌였고, 그 결과는 아난총장의 조기총선 불가 결정으로 나타났다. 알-시스타니는 그동안 유엔 판단을 존중하겠다는 입장을 밝혀 왔기 때문에 6월이전 조기총선 실시 불가 견해를 수용할 전망이다. 시아파의 조기 총선 요구는 수포로 돌아갔다고 볼 수 있다. ◆주권이양 시한 유지= 조기 총선 실시 불가로 이라크의 향후 정치일정이 모두순연되기 보다는 미세한 조정이 이뤄지는 쪽으로 갈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관측된다. 이날 아난 총장이 조기총선 불가입장을 발표하기 직전 폴 브리머 이라크 미 군정 최고행정관이 기자회견을 열고 조기 총선 실시 문제와 연관돼 있는 주권이양 일정을 준수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기 때문이다. 또 아난 총장도 주권 이양 일정은 지켜져야 한다는 견해를 표명했다. 그동안 주권이양 일정에 대해선 알-시스타니가 주권이양전 총선을 요구해 왔고,이 요구에 대한 유엔 실사단의 평가 결과 공개 및 대안 권고가 임박해지면서 온갖추측이 무성했다. 아난 총장이 실사단의 평가 결과를 토대로 기존에 설정된 주권이양 시한 이전총선실시가 어렵다는 판단을 내릴 것으로 알려지면서 주권이양 시점 연기가 불가할수 있다는 견해가 대두했던 것이다. 그러나 브리머 행정관과 아난 총장이 사전 물밑 조율이라도 한 듯 이구동성으로주권이양 일정 준수 의지를 천명함으로써 올 6월 말 주권이양은 준수되는 쪽으로 가닥이 잡혔다. ◆남은 과제= 브리머 행정관은 주권을 이양받을 임시정부 구성 방식으로 여러가지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다고 밝혔고, 아난 총장도 총선 실시전 이라크를 통치할과도정부 구성 방식을 연구중이라고 말했다. 미국의 애초 구상은 이달중 제정될 기본법에 따라 5월까지 간접선거를 치러 18개주 대표로 구성된 과도의회를 구성하고, 과도의회에 의한 임시정부를 6월까지 출범시켜 주권을 넘기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년 3월까지 구성될 제헌의회에서 마련되는 헌법안을 국민투표로 확정한 뒤 새 헌법에 따라 내년중 이라크 정부를 출범시킨다는 복안이었다. 하지만 시아파의 조기총선 요구와 더불어 간접선거를 통해 과도의회 및 임시 정부를 출범시키려는 미국의 계획도 백지화되면서 당장 주권을 넘겨받을 주체를 어떻게 꾸밀 지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브리머 행정관은 이와 관련, 기존에 설정한 데드라인을 지키면서 시아파의 불만을 달랠 수 있는 제3의 대안을 모색하고 있음을 강하게 내비쳤다. 일각에선 기존의 과도통치위를 확대 개편해 일단 주권을 넘긴 뒤 내년으로 예정된 총선을 연내로 앞당겨 실시하는 방안을 유력한 대안으로 거론하고 있다. 시아파는 총선 연기의 전제로 가급적 이른 시일의 총선을 요구하고 나섰다. 실제 시아파와 미국측에서는 과도통치위 확대개편을 통해 주권을 이양하는 방안을 선택 가능한 대안으로 여기고 있음을 나타내는 신호가 나오고 있다. 시아파 위원회의 아흐메드 샤이야 바라크 위원은 19일 "유엔이 선거를 연기하는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면 한시적으로 이라크 주권을 과도통치위에 넘길 수도 있다"고 말했다. 미국도 과도통치위 확대개편을 통한 주권 이양 가능성을 계속 흘려왔다. 이와 관련, 한 소식통은 과도통치위 현 구성비를 유념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즉, 과도통치위원 25명은 시아파 무슬림 13명, 수니 무슬림 5명, 쿠르드족 수니파 5명, 기타 2명으로 결합 가능성이 없는 수니파 무슬림과 쿠르드족을 떼어 놓고보면 시아파가 압도적 다수인 52%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소식통은 “시아파는 기존 과도통치위를 확대 개편하는 방식으로 정치적 주도권을 이끌어 낼 수 있다고 판단하는 것 같다"며 "유엔의 권고로 미측과 시아파의갈등은 일단 봉합된 셈"이라고 평가했다. (바그다드=연합뉴스) 박세진특파원 parksj@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