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크 관리를 지금처럼 '비 올 때 우산 빼앗아 가는 식'으로 해서는 안된다. 거래기업의 경영지표가 나빠졌다면 그것이 구조적 문제인지, 아니면 일시적인 문제인지 따져봐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은행은 어느 한 은행이 대출금을 회수했다는 소문만 나면 앞뒤 안가리고 너도나도 '묻지마' 식으로 회수에 들어가곤 한다." 국책은행의 한 고위 관계자는 체리부로의 부도 사례를 두고 이렇게 지적했다. 이 관계자는 또 "외환위기 이후 은행들이 지나치게 단기적인 수익성에 집착하고 부실여신 취급자를 과도하게 처벌하고 있는 관행이 이런 부작용을 낳고 있다"며 금융계 풍토의 근본적인 수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 과도한 부실여신 제재 ='묻지마'식 여신 회수가 빈발하는 1차적 원인은 부실여신 취급자에 대한 징계가 과도하기 때문이다. 거래기업이 부도나면 해당 여신을 취급한 직원과 임원들은 감사를 받고 책임을 지게 돼 있다. 특히 다른 은행들은 여신을 회수했는데 자신들만 회수를 못했을 경우엔 책임을 면키 어렵다. 국책은행 한 임원의 경험담은 그 좋은 사례다. 그는 최근 대전에 있는 중소기업 B사로부터 대출 요청을 받고 부하직원에게 검토해 보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심사보고서는 '대출 거절'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다른 은행들이 B사 대출금을 회수하고 있다. 우리가 지원해봤자 C은행이 그 돈을 그대로 빼내간다"는 것. 이에 대해 이정조 리스크컨설팅코리아 사장은 "어느 직원이 수십개 기업에 대출해 1백억원을 벌고 그 중 한 기업에서 1억원을 손해봤다면 칭찬받아야 하는 것 아니냐"며 "그러나 요즘 금융계의 현실은 그 1억원 때문에 문책당한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 지나친 단기 수익성 추구 ='묻지마'식 여신 회수의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외환위기 이후 나타난 'NIMT(Not In My Term) 증후군'에 있다. 한 마디로 '내 임기 중엔 손해나는 일을 하지 않겠다'는 것. CEO들이 실적과 주가에 의해 평가받게 된 데 따른 현상이다. 이러다 보니 모든 의사결정이 단기적 안목에서 이뤄질 수밖에 없다. 부실 징후가 보이면 당장 회수에 들어가서 손실을 최소화해야 하는 것이다. 부실여신 취급자에 대해 '일벌백계'하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중소 수출업체인 A기업은 그 좋은 사례다. A사는 지난해 반기 결산 때 적자로 돌아섰다. 대규모 시설투자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탓에 가동률이 낮았던 반면 회계처리상 감가상각비는 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은행들은 곧바로 대출 회수에 나섰고 결국 이 회사는 수출 방식을 외상거래에서 현금거래 방식으로 바꾸는 비상 전략을 펴고 있다. 당연히 다른 거래조건들은 불리해졌다. 작년엔 수협 등 일부 은행들이 단기적인 안목으로 수재민들을 '두 번 울린' 사례도 있다. 태풍 '매미'로 가두리 양식업자들이 큰 피해를 보자 정부가 보상금을 지급했는데 은행들이 대출금부터 갚으라고 몰려든 것. 은행들은 "담보물인 양식장이 유실돼 회수가 불가피했다"고 해명했지만 결과적으로 양식업자들의 회생 기회를 박탈해 자기들의 손실도 커졌다는 지적을 받았다. ◆ 기업들의 여신거래 관행도 문제 ='묻지마'식 여신 회수가 관행화된 데는 기업들의 책임도 있다. 평상시 채권자들에게 회사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신뢰를 높이는 노력이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주식 투자자를 대상으로 한 기업설명회(IR)에는 전사적인 노력을 기울이면서도 채권자를 상대로 CR(Creditor Relationship)를 하는 기업은 한 군데도 없다는 것. 때문에 채권금융회사들로서는 회사의 장기 비전보다는 단기적인 재무상태 변화만으로 리스크 관리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김인식 기자 sskis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