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9년 '쉬리'로 한국영화계에 블록버스터 시대를 열었던 강제규 감독이 5년만에 전쟁액션 '태극기 휘날리며'(제작 강제규 필름)를 5일 개봉했다. '쉬리'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흥행전략을 철저히 벤치마킹한 모작이었다면 '태극기…'는 할리우드 액션대작들과 대등한 경쟁을 펼칠 수 있는 국산 블록버스터의 전범으로 평가된다. 방대한 물량, 세련된 기술, 탄탄한 드라마로 국산 대작영화의 수준을 한차원 끌어 올렸을 뿐더러 할리우드 액션대작들에 부족한 뜨거운 눈물과 감동의 물결마저 면면히 흐른다. 21세기초 유해발굴단의 6.25참전용사 유골 발견과 참전용사 이진석 노인의 회상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시간적으로는 한국전쟁 하루 전날부터 낙동강방어전투, 서울 수복과 평양진격, 중공군의 개입과 1.4후퇴까지 고비의 전쟁사를 기둥으로 남북한 군인들의 살육전, 피난민의 당혹감, 국군과 공산군의 양민학살 등 전쟁의 참상들을 훑는다. 비극의 중심에는 전쟁이란 거대한 악에 속절없이 희생되는 두 형제의 우애와 갈등이 있다. 우애가 한국적인 가족애에 바탕했다면 갈등은 '영웅이 될수록 인간과는 멀어져야 하는' 전쟁의 자기 분열적인 속성에서 빚어진다. 진태(장동건)가 전쟁의 모순율을 육화한 캐릭터라면 진석(원빈)은 인간이기를 고집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전쟁의 소용돌이는 두 형제의 애증마저 집어 삼켰다. 존재의 비극성은 이처럼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곳으로 운명이 내몰렸을 때 파생된다. 이 작품은 전쟁이 육친을 앗아간 가족들의 고통과 절망을 극적으로 제시했다. 영웅을 찬양하거나, 전쟁의 광기와 폭력을 부각시키는데 열중해 왔던 대부분의 할리우드 전쟁대작들과 차별화된다. '라이언 일병구하기'도 휴머니즘을 내세웠지만 어디까지나 일병을 찾아가는 군인들의 작전이 중추였다. 전장의 참상이 능란한 특수효과를 통해 세련된 영상으로 구현됐고 들고찍기로 보여주는 전투신은 생동감을 극대화했다. 고막을 찢을 듯한 폭음과 함께 쏟아지는 흙더미, 포탄과 총탄세례에 팔다리가 툭툭 잘리는 전투신들은 관객들을 50여년전의 평양시가전이나 두밀령 고지 공방전을 생생하게 체험토록 해준다. 산록을 가득 메운 중공군의 인해전술은 웅장한 스케일로 압도한다. 15세 이상. 유재혁 기자yoo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