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0년 4.13 총선을 앞두고 현대그룹에서현금 200억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기소된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에 대한 29일 선고공판은 시종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당초 조서의 증거능력, 공소사실의 개연성 여부를 놓고 치열한 공방이 벌어져권 전 고문이 `진승현 게이트'에 이어 또 무죄를 받는게 아닌가 하는 섣부른 관측도있었으나 법원이 검찰의 수사 결과를 전폭 수용해 법정최고형을 선고함으로써 검찰의 대형 비리 사건 수사가 한층 탄력을 받게 됐다. 재판을 맡은 서울지법 형사3단독 황한식 부장판사는 선고에 앞서 "신이 아니어서 진실을 모두 알 수는 없지만 증거를 통해 진실을 찾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며 "오판이 아니기를 기도한다"고 말해 그동안의 적잖은 고민을 짐작케 했다. 지인과 취재진 60여명이 조용히 지켜보는 가운데 법정에 나온 권 전 고문 역시주민등록번호를 묻는 재판장의 질문에 긴장한 탓인지 얼른 대답을 못했고 "선고가길어질 줄 모르니 앉으십시오"라는 권유에도 "괜찮습니다"라고 사양했다. 이날 선고 공판은 ▲ 공모관계 불특정 ▲ 김영완.정몽헌.김충식씨 조서의 증거능력 유무 ▲ 5차례 현금전달 개연성 여부 ▲ 대가성 등 4가지 쟁점에 대한 재판부의 판단을 밝히는 방식으로 무려 30여분 넘게 진행됐다. 재판부는 조서의 증거능력에 대해 "조서 작성시 강압적 분위기가 없었고 다른사람들의 진술과도 상당부분 일치, 증거능력과 신빙성이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이는 현대비자금 150억원을 받은 혐의 등로 구속기소돼 1심에서 징역 12년이 선고된 박지원 전 문화부 장관의 재판에 이어 김영완씨 조서의 증거능력을 법원이 다시한번 인정한 것으로, 그동안 계속됐던 증거능력 논란을 불식시킨 것으로 평가된다. 재판의 최대쟁점 중 하나로 볼 수 있는 `5차례 현금전달'이 가능한지에 대한 재판부 입장을 밝히는 부분에서 검찰과 피고인측은 한층 긴장한 표정으로 재판장의 목소리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현금 전달이 토.일요일에는 이뤄지지 않았고 김영완.김충식.이익치.전동수씨의출입국 관리기록에 비춰 현금 전달이 가능한 날은 2000년 3월 27,28일 이틀 뿐이므로 5일에 걸친 자금 전달이 있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게 변호인측 주장. 재판부는 그러나 "토요일도 전달이 가능했고 변경된 공소장에 따라 전달시점을4월 초순까지 연장하면 전달가능 일수는 모두 10일이며 출입국 당일까지 포함하면일수는 더 늘어난다"며 검찰측 손을 들어줬다. 권 전 고문은 유죄를 직감한 듯 꼿꼿하게 서있던 자세를 바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으며 변호인들도 두 눈을 감아버렸다. 권 전 고문은 재판부가 대가성에 대해 "피고인이 정몽헌씨를 만나 청탁을 받은점이 엿보인다"는 판결문을 읽어내려가자 갑자기 뒤를 돌아보며 "만난 적도 없는데만났다고 하네"라며 강한 불만을 표출했다. 재판부가 "피고인이 고령으로 각종 질환을 앓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민주화 운동에 기여했고 구시대 정치시스템 상 악역을 담당한 면이 있다"고 `정상' 참작 의사를비쳤지만 권 전 고문은 굳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재판부는 "그러나 정권 실세로서 지대한 영향력을 이용, 현대그룹에서 청탁을받고 알선수재액으로는 유례가 드문 200억원을 받았다"며 "이는 정경유착의 전형으로 결국 국민경제 손실로 이어졌다"고 질타했다. 또 "피고인은 범행적발을 피하려고 현금으로 받고 50억원을 개인적 목적에서 숨겨뒀음에도 범행을 부인하며 반성하는 기미가 없다"면서 "성실한 대다수 국민이 받았을 충격을 감안해서라도 엄정한 처벌이 불가피하다"고 법정 최고형을 선고했다. 권 전 고문은 허탈한 표정으로 "이건 아니다. 하늘이 알 것이다"라며 여전히 혐의를 부인했고 변호인도 "심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고 볼멘 소리를 했지만 무죄를 주장하던 법정 공방 당시의 기세는 이미 꺾여 버린 듯했다. (서울=연합뉴스) 류지복 기자 jbryoo@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