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을 피하고 새로운 시장을 창출해야 세계적인 기업이 될 수 있다." 20세기 말 유럽을 뒤흔든 전략론인 '가치혁신(Value Innovation)'의 핵심 화두다. 가치혁신론은 프랑스 인시아드(INSEAD) 경영대학원의 김위찬 교수와 르네 마보안 교수가 지난 90년대 중반 함께 만든 전략론으로 유럽에서는 최고의 전략론으로 인정받고 있다. 마침 가치혁신론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는 행사가 미국에서 열렸다. 고광철 한국경제신문 뉴욕특파원이 국내 언론 가운데는 유일하게 초청받아 세미나에 다녀왔다. < 편집자 > ----------------------------------------------------------------- 가치혁신이론은 경쟁 기업을 누르는 방법으로 시장 1위가 되겠다는 전통적인 경쟁 전략에서 탈피하자는 데서 출발한다. 삼성전자를 예로 들면 소니의 시장점유율을 잠식해 세계 1위가 되겠다는 전략을 버리는 대신 회사와 제품의 가치를 높이는 방법에 집중하는 전략을 택해야 한다는 조언이다. 이를 통해 새로운 시장을 창출해야 세계 선도 기업이 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김 교수와 마보안 교수는 지난 10∼13일 미국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에서 열린 세계전략경영연구회 제23차 연차총회에서 개막 세션을 주재했다. '성과와 비용의 상충관계를 깨뜨리는 전략'이란 주제의 세션에서 두 교수는 가치혁신을 통해 돈이나 시간을 더 쏟지 않고도 실적을 높이는 방법을 집중적으로 다뤘다. 실제 성공사례를 소개하기 위해 윌리엄 브래튼 로스앤젤레스 경찰국장과 패트릭 스노볼 영국 노르위치 유니언 CEO를 토론자로 초대했다. 브래튼 국장은 지난 94∼96년 뉴욕 경찰국장으로 있으면서 직접 추진한 공공기관 혁신 내용을, 스노볼 CEO는 영국 최대 보험회사의 혁신사례를 각각 소개했다. 김 교수와 마보안 교수가 주장하는 가치혁신이론은 경제학자 슘페터가 말한 '창조적 파괴'와 경영학의 대가인 마이클 포터 하버드 경영대학원 교수가 주창한 '경쟁 전략'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것. 예를 들어 포터 교수는 기업이 경쟁우위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다른 기업과의 차별화 전략을 택하거나 아니면 가격을 현저하게 낮추는 저비용 전략을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이에 대해 "시장이 한정된 상태에서 저비용이나 차별화 전략으로 치고 받는 싸움을 해가지고는 세계 선도 기업이 될 수 없다"며 "세계를 선도하는 기업이 되려면 시장을 새로 만들어가는 가치혁신 전략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저비용 전략은 로엔드(low end),차별화 전략은 하이엔드(high end) 시장에서만 부분적으로 먹혀드는 한계가 있다는 게 그의 지적이다. 김 교수는 80년대 소니가 새로운 시장을 창조한 획기적 상품인 워크맨을 내놓은 사례를 들며 후발 기업들은 그같은 새로운 개념의 가치혁신에 주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의 이같은 주장은 경제학자 슘페터가 자본주의의 성장동력으로 제시한 창조적 파괴도 부인한다. 가치혁신은 시장을 파괴하지 않고 '재건축(Reconstruction)'한다는 점에서 창조적 파괴와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한걸음 더 나아가 슘페터의 기술혁신과 기업가정신도 경영전략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VCR 기술을 개발한 미국의 엠펙스와 그 기술로 돈을 번 소니, JVC 등 두 일본 기업을 예로 들었다. 김 교수는 "거시경제 관점에서 접근하는 슘페터 이론은 기술을 혁신한 엠펙스와 가치를 혁신한 소니 및 JVC의 차이에 관심을 쏟지 않지만 경영전략 관점에선 누가 돈을 벌었느냐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가치혁신은 '일정한 패턴'이 있기 때문에 기업뿐 아니라 공공부문에서도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와 마보안 교수는 1880∼2000년을 대상 기간으로 34개 분야 1백50개 기업을 분석,이같은 이론을 실증적으로 확인했다. 예컨대 대량 생산 시스템으로 '모델 T'를 도입한 포드자동차나 컴퓨터를 만든 IBM 등 세계를 선도했던 기업은 기존 시장에서 점유율 경쟁을 벌이지 않고 시장 자체를 획기적으로 창출했던 주인공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김 교수는 "기업의 공급 능력은 급속히 팽창하고 인구증가율은 둔화되는 상황에서 수요를 창출하지 않는 경쟁은 이전투구가 될 수밖에 없다"며 "차별화와 가격을 동시에 선도하는 가치혁신으로 새로운 시장 공간을 넓혀야만 세계 선도 기업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볼티모어=고광철 특파원 gwang@hankyung.com